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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소년법 폐지하면 청소년 범죄 사라질까? 그럴리가

[인권으로 읽는 세상]가해자이기만 한, 피해자이기만 한 청소년은 없다

최근 부산에서 발생한 청소년 폭력 사건을 계기로 소년법 폐지 여론이 일고 있다.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은 엄벌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나는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다. 중학교 때 시골에서 도시로 전학 왔다. 친구도 거의 없던 시절, '일진'은 못 되고 같은 반 학생이나 괴롭히고 다니던 녀석들이 특히 나를 괴롭혔다. 청소년 폭력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면 그때 생각이 나 마음이 무거워진다. 거의 20년이 지나가지만 나를 때린 가해자도 제대로 책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년법 폐지 주장은 하나도 반갑지 않다. 책임은 처벌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소년법이 아니라 형벌주의가 문제

소년법을 폐지하자는 주장에는 '청소년이라고 봐주지 말자', '엄벌해야 문제가 풀릴 것'이라는 인식이 담겨 있다. 하지만 2007년 소년법 개정의 경험은 청소년 폭력의 문제가 소년법 폐지로 해결될 수 없음을 이미 보여주었다. 당시 개정은 소년법 적용 상한 연령 20세를 19세로 낮추고, 처벌 제외 연령도 12세에서 10세로 낮추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2007년 소년범 11만5000명 대비 2008년 12만3000명, 2009년 11만8000명으로 청소년 범죄율의 증감 추이는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이후 증감률도 2007년 이전과 대동소이 하다. 오히려 소년범의 재범률만 꾸준히 상승해왔다.

시야를 형법체계 자체로 넓혀야 한다. 응징, 즉 형벌주의를 중심으로 한 형법체계는 실제 범죄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회적 논의를 오히려 가로막는다. 해당 공동체와 국가, 사회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 묻지 않고 더 강한 처벌, 예외 없는 법집행을 외치며 가해자에게만 모든 책임을 전가한다.

처벌이라는 종결

한국 사회에서 폭력은 갈등관계, 권력관계의 문제를 가장 쉽게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다. 선배가 후배에게, 아버지가 아내와 자식에게, 교사가 학생에게, 국가가 국민에게 물리력을 행사하고 정당화한다. 폭력은 순환하고 강화되며 사회를 폭력적으로 만든다. 폭력이 폭력을 낳고, 피해를 재생산하며, 방관하는 다수가 만들어지는 현실 속에서 청소년 폭력만 동떨어진 사회현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많은 청소년이 경험하는 가정이나 학교, 친구 관계의 폭력 경험은 청소년 폭력의 사회적 조건 중 하나다. 그러나 국가나 사회는 청소년 폭력의 고리를 끊어낼 지점을 못 잡고 있다.

경찰이나 검찰은 청소년 폭력 사건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는다. 청소년 폭력이 발생해도 많은 경우 과도기적 일탈로 치부하며 실질적 교정의 기회보다는 경미한 처분을 받는 경우가 많다. 정도가 심한 경우에 검찰의 수사를 받지만 실제 기소가 되기보다는 다시 가정이나 학교로 돌려보내져 실패를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청소년 폭력은 예방되지도 교정되지도 않은 채 반복되고 있다. 실패의 연속선상에 가해 청소년을 엄벌해야 한다는 주장도 함께 있다. 지금까지 학교와 가정이 해결하지 못했으니 국가와 사회가 나서서 또다시 응징해야 한다는 폭력의 승인.

응징이 폭력을 정당화하고 폭력이 응징을 부르는 악순환에서 청소년은 자기 문제를 스스로 직면하고 책임지는 주체로 등장하지 못한다. 내가 폭력을 당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서지 않았다. 주변 친구든, 학교 선생님이든 말이다. 억울해서 쉬는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 버리자 선생님이 반 애들을 불러다 모조리 몽둥이로 때렸다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다. 나조차도 학년이 바뀌기만 기다렸지 내가 당한 폭력의 문제를 직면하고 싶지 않았다. 소년법 폐지는 그때의 내게 어떤 이야기를 건네줄 수 있을까? 그저 강한 처벌로 종결을 앞당기자는 이야기처럼 들렸을 것 같다. 소년법 폐지 여론에 불편한 마음이 앞서는 것은 내가 매듭짓기 전 종결시키려는 이야기 이상으로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엄벌을 바라는, 내게도 가끔은 스쳤던 마음이 금세 사그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처벌만 부르짖어선 안 된다는 말이 곧 잔인한 폭력을 휘두른 청소년을 봐주자는 이야기로 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마음 깊은 곳을 봐야 한다. 소년법 폐지 여론은 청소년 폭력을 예방하지도 교정하지도 못하는 사회의 실패에 낙담한 마음들의 또 다른 표현이다. 학교 안에서만 열 명 중 세 명이 학교 폭력을 경험한다. 집계되지 않는 폭력과 학교 밖 폭력 문제까지 포함하면 문제적 몇몇의 문제가 아니다.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와야 한다. 사회의 실패를 바로잡고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조건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

청소년, 권리의 주체

청소년이 시민 권리의 주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가해자이기만 한 청소년도, 피해자이기만 한 청소년도 없다. 폭력 사회를 살아내기 위해 나름의 방법을 찾아가는 사람들일 뿐이다. 청소년을 권리의 주체로 바라볼 때, 청소년은 문제 해결을 처벌로 퉁치고 폭력의 조건들을 방치하는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 다시 피해를 입지 않도록 사회적 역량을 만들어내기 시작하는 주체가 된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폭력의 피해보다도 수치심이 앞섰다. 피해의 경험을 알리는 행위나, 알리지 못하는 처지나 모두 '쪽팔리기'는 마찬가지였다. 피해자임을 인정하고 드러내기 힘든 조건 속에서 피해자로서의 기간은 더욱 길어졌다.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하지 않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그때 나에게 괜찮다고, 또 당당하게 폭력을 거부하고 대처할 권리가 있다고 누군가 이야기해줬다면 나는 다른 기억을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가해자도 마찬가지다. 몽둥이로 두들겨 패기만 하는 선생님이나 몇 시간 붙잡아 뒀다 훈방조치 하는 경찰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스스로 인식하고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돕는 시스템이 있었다면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그래야 폭력과 응징의 구도에서 벗어나고 청소년도 스스로 필요한 요구와 짊어져야 할 책임을 인지할 수 있다. 그래야 폭력을 멈출 것을 요청할 수 있고,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두려움을 깨고 주변 문제에 개입할 수도 있다. 폭력을 스스로 정당화하기보다는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역량을 키우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청소년은 권리의 주체로서 스스로의 문제에 개입할 통로를 가져야 한다.

청소년만의 노력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가령 장애인의 자립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노력이나 가족의 지지·지원도 필요하지만 지역사회, 국가의 역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청소년 폭력의 문제 역시 기존처럼 방치하거나 부모에게 위탁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모델을 만들면서 해결하자. 부모를 대신해 청소년을 보호하면서 교정을 해나가는 사법적 그룹홈이어도 좋고, 부족하다면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나가도 좋다. 국가는 청소년을 권위적인 방식으로 통제하고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 권리의 영역을 넓히고,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을 제도적, 사회적으로 마련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청소년 폭력이 청소년만의 문제가 아니듯 예방 역시도 학교와 가정을 포함해 주변의 협력적인 관계를 형성해야 문제가 풀릴 수 있다. 권력 관계가 아닌 협력 관계를 만들기 위한 사회적 역량을 강화하는 일은 사회가 청소년을 동등한 권리 주체로 얼마나 인정하며 실질적 조건을 마련해 나가는가에 달려있다. 청소년 주위의 직접적인 관계의 지지만큼 사회적 지지와 지원의 풀(Pool)이 확보되어야 한다.

피해자를 위한다면

소년법 폐지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나는 가해자에게 형식적인 사과조차 받은 적이 없다. 당연히 나에게 용서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하면 내가 이 일을 이렇게 오래오래 기억하는 이유는 용서의 기회를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그때 가해자가 사법적인 처벌을 제대로 받았다면 지금 나는 다른 기억을 갖고 있을까? 물론 조금 더 후련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에 느꼈던 수치심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기억이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 같은 청소년 폭력의 피해자가 20년이 지나도 폭력의 경험을 문득 곱씹게 되는 일이 더 이상 없길 바란다. 처벌이 아니라, 피해 경험으로부터의 회복과 폭력으로부터의 자유를 목표로 논의의 방향을 재설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