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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참 어색하게도 전 성과주의자랍니다

긴 5월 연휴를 보내고 대선 투표를 하루 앞둔 날 아침, '0.1%의 가치'라는 신문의 칼럼을 읽게 됐습니다. 선거 때만 되면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애매한 감정을 겪게 되는 저와 비슷한 주변 사람들을 위로하는 글 같았습니다. 거리에서 싸우던 우리의 노력이 지금 대선 후보들의 세련된 공약이 되었고, 우리의 노력은 현실을 쫓아가지 못한 운동이 아니라 미래를 당기는 운동이라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참 잘 쓴 글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위로'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글이기도 했습니다.

한 달여 전에 읽은 글이 문득 떠오르는 건, 사랑방 활동에서든 제 생활에서든 눈에 보이는 성과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비정규직 문제에 전향적인 행보를 보이는 것은 그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때문이라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인천공항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선물'을 가져왔다고 하고 '한꺼번에 다 이루려고 하지 말라'는 말을 듣는 상황은 '성과'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국정원, 경찰, 검찰과 같은 권력기관에 대한 감시와 견제는 인권단체들이 열심히 해 온 활동입니다. 정부가 개혁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지금, 추상적인 원칙을 넘
어서 구체적인 변화와 성과를 가져오는 디테일한 활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때이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면 지금 운동에 필요한 게 너무 많다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부족한 활동가 수, 정책역량, 이 모든 걸 연결하고 소통하면서 운동의 큰 그림을 그려나갈 그 무엇까지. 그러다가 '에라 모르겠다'하기 십상입니다.

대통령님의 말씀처럼 모든 걸 한꺼번에 이룰 순 없고, 일단 활동가들부터 스스로 관성에 빠지지 않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주제넘은 이야기일 순 있습니다만, 제가 볼 때 지금 운동에는 '개혁이냐 혁명이냐'보다 '관성이냐 혁신이냐'가 더 중요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평가를 위한 평가가 아니라 자기객관화를 통한 진짜 평가, 뭐든 익숙한 대로 정신없이 사는 것보다는 하던 일 다 멈추고 곰곰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닐까요? '새롭고, 다양하고, 자발적인 여러 활동'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관성 또는 교조가 된 건 아닐까요? 정작 자신은 바뀔 준비가 하나도 안 돼 있는데 말입니다.

사실 이건 뭐 다른 사람을 평가하거나 비난하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냥 제 이야기입니다. 그놈의 '성과'를 손에 쥐고 싶은 마음에....한 번도 내가 찍은 후보가 당선된 적도 없는 인생을 살아오다보니 이렇게 됐네요. 제 활동도 활동을 위한 활동이 아니라 이 사회에 도움이 되고, 다음 활동을 위한 밑거름이 되고 차곡차곡 쌓이는 '성과'가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제 생활에서도 이런 욕구가 불쑥불쑥 솟아오를 때가 있습니다. 활동가들에게 안식년에 뭐할거냐고 물으면 제일 많이 듣는 답이 '운동', '영어공부', '여행'입니다. 저도 여행 말고는 비슷합니다. 참 이상하죠? 제가 지금 영어를 배워서 뭐하겠다고, 운동이야 하면 좋지만 몸이 많이 아픈 것도 아닌데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것도 '성과'를 손에 쥐고 싶은 제 욕구입니다. 세상 바꾸는게 제 마음대로 될 리가 없지만, 마치 수련을 하듯이 꾸준히 제가 운동이나 공부를 해서 마치 게임에서 레벨을 올리는 건 할 수 있을 것 같은 거죠. 운동을 해서 근육을 키워나가는 재미, 어학공부를 하면서 실력이 느는 걸 확인하는 재미가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촛불로 정권퇴진 시킨 요즘 정세에 할 말은 아니지만, 운동을 해서 세상 바꿔나가는 재미는 언제 느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