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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논평> 노동자들 가슴에 꽂힌 '칼'

"노동자가 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 아찔한 지상 35m 창공, 사랑하는 가족과 안타까운 동지들 얼굴 하나하나 떠올리며 자신의 목에 밧줄을 둘러매야 했던 한진중공업 김주익 지회장에게 이 땅은 그런 나라였다. 노동자들이 죽음으로 항거해야만 쥐꼬리만한 권리라도 그나마 얻어낼 수 있는 나라.

그러나 그를 떠나보내야 했던 사람들은 어깨 들썩이며 이렇게 흐느꼈다. 작업복 넝마처럼 기워 입고 쥐새끼마냥 뒹굴며 감전으로 혈관이 터져 죽고 떨어져 죽고 퉁퉁 불어 죽어도, 조선소 짬밥 20년에 100만원 받아도 참을 걸 그랬다고. "노예가 품었던 인간의 꿈. 그 꿈을 포기해서라도 그가 돌아올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다"고.

그런데도 푸른기와집에 들어앉은 높으신 그 양반은 이 땅 노동자들을 사지로 떠민 것도 모자라 또 다시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 죽지 못해 사는 자들의 가슴에 칼을 꽂는다. "지금처럼 민주화된 시대에 노동자들의 분신이 투쟁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다. 지금이 전태일이 살던 시대도 아닌데 자살이 계속되는 것은 뭔가 다른 게 있는 것 같다던 영등포경찰서장. 상급단체들이 '근로자의 사망사건'을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던 경총. 그 바통을 이제는 대통령이 이어받았다.

청춘을 다 바친 직장에서 그냥 내쫓길 수는 없다고 파업 한번 해볼라 치면 온갖 '불법' 딱지 붙고, 용역깡패에 두들겨 맞고, 구속 수배에 해고도 모자라 친지들 집과 선산까지 가압류당하고 배 쫄쫄 굶으며 눈치보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이 땅 노동자들의 아픈 현실이다. 정규직의 절반밖에 안 되는 임금 받으며 온갖 멸시 다 참아내고 작업장에서 죽어나가도 목숨값마저 절반밖에 안 되는 것이 이 땅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이러한 현실을 애써 외면하며 세상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동료의 주검을 가슴에 묻고 거리로 나온 이들에게 곤봉과 방패를 휘두른다.

이런 노동자들에게 손배·가압류 남용 제한하고 비정규직 차별 철폐하겠다는 정부의 거듭된 약속은 한낱 공수표에 불과하다. 정부가 나서 공공부문 사업장에 400억원 손배·가압류 때리고, 노동부 직원의 절반을 비정규직으로 채우고 있는 상황에서 그 누가 정부의 약속을 믿을 것인가.

노무현 대통령과 정부는 또다시 '시대'와 '불법' 운운하며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기 전에 자신에게 되물어야 한다. '민주화된 시대'라는 노무현의 시대에 왜 70년 전태일의 유서와 오늘 죽어간 이들의 유서가 같을 수밖에 없는지를. 내놓을 것이라곤 목숨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절규가 무엇인지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