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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침] 세상 속에서 살고 싶다

-수원중증장애인독립생활센터 장경수 소장

<편집자주> [외침]은 한국사회의 인권현장, 바로 그곳에 있었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가공 없이 그대로 담는 기획이다. 지식인이나 활동가 등은 글쓰기 등을 통해 자기 얘기를 남기지만 인권현장에서 그 원인과 결과를 고스란히 삶으로 받아내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외침’은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려 한다.


경기도청이 자리한 수원역 근처의 언덕배기에서는 50여 일이 넘도록 중증장애인들이 활동보조인 서비스 제도화를 요구하며 길거리 농성을 하고 있다. 도청의 묵살과 무응답이 이어지는 나날 중 큰 슬픔이 찾아왔다. 이들은 지난 주 금요일(10월 25일), 함께 하던 동료인 정정수 씨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뇌수막염을 앓던 중증장애인 정정수 씨는 독립생활의 꿈을 키우고 있던 중 사망했다. 동료들은 오랜 농성참여로 인한 과로사라고 여긴다. 고인과 함께 활동했고 중증장애인 독립생활의 꿈을 현실화하려는 장경수 소장을 만나봤다.

활동보조인 제도화를 위한 투쟁

저희는 중증장애인 활동보조인 제도화를 위한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경기도에 시설도 많고 중증장애인, 재가장애인 많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지금까지 진짜 사는 것 같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오셨잖아요. 진짜 손 하나도 제대로 못 움직이는 장애인이 많은데, 예를 들면 누워서 주무실 때도 활동보조가 필요한 분이 계세요. 욕창 걸리신 분이 계시기 때문에 잘 때 몸을 움직여 줘야만 잠을 조금이라도 청할 수 있거든요. 그런 분들이 많이 계신데, 지금은 유료이거나 생활도우미 정도가 있어요. 일정하게 정한 시간에 하루에 약 두 세 시간, 일주일에 한두 번 많아야 두세 번, 복지관 같은 곳에서 파견해주는 도우미는 진정한 활동보조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분들이 하시는 것은 반찬 만들어놓거나 빨래, 방청소에 국한돼 있고, 그건 시혜 쪽이나 자원봉사에 가깝기 때문에 장애인들이 내게 필요한 것, 내가 꼭 하고 싶은 것을 얘기 못하는 부분이 많아요. 일방적으로 봉사자 입장에서 해주고 장애인은 받는 쪽이거든요.

진정한 활동보조인을 어떻게 얘기해야 하나? 정말 중증장애인도 같은 사람인데 하나의 인격체로 태어난 것이고, 거기도 욕구들도 있고, 같은 사람이니 지역사회에서 살고 싶고 직업생활이라든가 나가서 활동하고 싶거든요. 정말 중증장애인들은 집안에만 있어야 하거든요. 아니면 그 온갖 인권유린 당하는 그런 시설에 갈 수밖에 없는 조건에 처해있어요. 지금은 부모나 가족이 책임지는 세상이 현실이거든요. 식구들이 챙길 수 없는 상황이 왔을 때 장애인 본인이 시설을 원하겠습니까? 어쩔 수없이 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에요. 그래서 인간처럼 살 수 없고, 집에서 가족이 보호한다 하더라도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없는 거거든요. 활동보조인이 보편적인 권리로 인정돼서 누구나 충분히 원하는 데로 이용할 수 있게 되면, 중증장애인들도 서비스가 제대로 되면 밖에 나가 움직이고 최소한의 사람다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고, 독립생활도 가능하고 그런 의미에서 활동보조인 제도가 중요하고 이뤄져야 한다고 봐요.

사망 전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당시의 정정수 씨

▲ 사망 전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당시의 정정수 씨



제도화를 이루고 시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오늘로 54일째 노숙농성을 하고 있어요. 서울이나 인천, 광주, 울산 같은 데서는 전부다 조례를 제정하고 활동보조가 시급히 필요한 중증장애인에게 제공하겠다고 약속을 해놓은 상태인데 유독 경기도는…….

농성하면서 도지사가 면담을 딱 한 번 했는데 전혀 활동보조가 무엇인지 개념조차 모르고 있는 상태거든요. 도지사 당선 전에 질의서 보내고 했을 때 답변서에는 전형적인 말들, 실시하겠다고 얘기했어요. 그랬는데 지난 번 면담 얘기를 들어보면 “그런 거는 상황에 따라 변화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해요.

농성하는 동안 별별 일이 있었죠. 도지사 면담이 자정, 밤 12시에 이뤄졌는데 그 다음날 아침 전경들에게 끌려나왔어요. 저는 휠체어가 뒤로 넘어갔어요. 머리가 너무 아파서 응급실로 실려 가기도 했고……. 여성장애인들은 무자비하게 들려서 휠체어와 몸이 분리돼 따로 따로 들려나왔어요. 이거 굉장히 위험한 일이거든요. 중증장애인들은 함부로 몸을 꺾는다거나 하면 치명적일 수 있거든요. 그렇게 무자비하게…면담한 바로 다음날, 그것도 밥 먹는 중에…….

점거도 하고 농성도 하고 거리 선전전도 하고 집회도 했어요.…근데 아이러니한 게 비장애인만 연행해가요. 뭐, 장애인들이 힘든 건 알아서 그런지…왜 비장애인만 연행해 가는지. 정작 하는 주체는 장애인들인데, 이 일은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을 선동해서 하는 게 아니잖아요? 저희들이 주체가 돼서 제도화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이고 비장애인들이 저희들을 위해서 아무래도 활동보조가 필요하니까 저희 뜻에 동조를 하셔서 참여를 하시는 건데, 그렇게 보지 않고 전혀 다르게 보고 있어요. 중증장애인들이 이끌려서 하는 것이라고 보는 그런 시각이 참 문제라고 생각해요.

고인이 된 정정수 씨 이야기

고인이 된 정정수 씨가 자주 하던 말이 있어요. “인생이 뭐 있겠냐? 아무것도 없다!” 자주 그런 얘기를 많이 했어요. “백 년도 못 사는 게 인간인데 아귀다툼 할 것 없이 서로 사랑하면서 평화롭게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자주 했죠. 많이 활동을 하고 싶어 했어요.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시던 분이었거든요. 그분이 뇌수막염이 있어서 몸을 약간 움직이기는 했지만 수동휠체어를 탄다고 하면 밀기조차 힘든 그런 장애인이었는데, 수원중증장애인 독립생활센터에서 같이 활동하고 경기장애인차별쳘폐연대에서 같이 활동하고……. 그 의지가 굉장히 강하시고 독립생활이라는 것, 활동보조라는 것, 그걸 굉장히 이루고 싶어 한 분이예요. 활동 전에는 집에서 오래 보내셨는데 장애인도 주체적으로 활동보조가 제공되고 기본 인프라·시스템이 갖춰진다면 본인을 포함해서 세상에 나가서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계셨고 의지가 강하고 누구보다도 그러셨던 분이예요.



군대까지 다녀오셨고, 제대할 무렵에 그렇게 돼서 15-16년을 장애생활로 지낸 거죠. 비장애인의 삶과 장애인의 삶을 둘 다 살았어요. 비장애인으로 왕성하게 살아가던 분이 어느 날 갑자기 병이 와서 장애인이 된 후에 16년이라는 세월을 사람같이 살아보지 못한 세월이었던 거죠. 사회에 나가 활동도 하고 싶고 전에도 그런 맘이 있었는데 사회가 그게 아니잖아요? 휠체어 타고 나와 가지고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고……. 포기하고 계셨는데 어떤 계기로 인해서 중증장애인도 나와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지금 있는 것 같은 독립생활센터 같은데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싶어한 분이예요.

그 계기란 게, 제가 먼저 만났어요. 제가 먼저 장애운동 쪽에 돌아다녔거든요. 서울집회에도 참가하고…중증장애인들이 목소리를 내야 사회가 변화된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지금 복지라는 게 모두 경증장애인 위주로 되어 있는 게 안타깝고 저는 뇌성마비 1급인데, 재가장애인, 중증장애인들이 나와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제가 센터 준비를 해오던 과정에서 정정수 씨를 만났고 같이 해오게 됐어요.

저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게 저하고 정정수 씨하고 나이가 한 살 차이밖에 안났고 제일 먼저 만났고……. 중증장애인들이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부족하잖아요. 친구 만나기도 어렵고…속으로만 앓고 있었고, 살아가면서 속에 담아뒀던 얘기를 많이 나눴어요.…저희 센터로 보면 부소장이셨는데…앞으로 어느 정도 잘 되는 모습도 보셔야 했고 일단 자기 뜻을 펼치려고 계획을 하고 있던 와중에 돌아가셔서 안타깝죠. 다른 동료 분들도 마찬가지고…….

장애인의 권리를 위해 장애인이 나서야

일반적인 생각이 도와주면 되지, 장애인들이 스스로 독립생활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 안하죠.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살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봐요. 몸에 장애를 입게 되면 당연히 외부하고는 단절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던 거고, 가족들이나 이런 분들도 일단 비장애에 가까운 생활을 하기 어렵다고 생각을 하시는 거고…활동보조인이 제도화되면 달라질 생각일 텐데, 일단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가족들도 본인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죠.

제 생각엔 정말 장애인들도 이제는 의식이 변화돼야 하지 않나 라고 생각해요. 장애인도 일단은 인간이잖아요. 기본적 권리를 갖고 태어난 거고 자기 권리잖아요. 보편적으로 모든 목숨이 있는 사람이라면 중증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여성이든 외국인노동자든 모두 인간이면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 이상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거고,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 이제는 자기 마음과 얘기를 할 수 있는 자신감을 좀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권리를 찾아서 권리를 행사하고 그동안 빼앗기고 행사하지 못했던 권리를 이제는 좀 찾는 노력들을 해서 사회에서 비장애인들과 어울려서 살 수 있는 그런 희망들을 갖고 그런 인식들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농성 중 삭발투쟁을 진행하고 있는 경기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들

▲ 농성 중 삭발투쟁을 진행하고 있는 경기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들



내가 살아온 이야기

저도 이 일한 지는 사실은 얼마 안돼요. 저는 돌 때 아팠어요. 35-6년 전이니까 병원에 가도 병원에서 몰랐죠. 지금 같으면 치료 같은 거 했을텐데. 그때만 해도 아무것도 몰라서 병원에서 정확한 병명을 모르고 감기약을 주고 그런 상태에서 몸이 연체동물처럼 늘어졌다고 해요. 며칠은 그런 상태로 있더니 며칠은 나무토막처럼 딱딱해지고 업지 못할 정도로…저도 집 바깥에 처음 나온 게 26-7살 때였어요. 그 전까지는 집에만 있었어요. 나가고 싶은 맘이야 많았죠. 학교는 전혀…유치원에도 못 가봤어요. 동네 친구들이나 형제들 배우던 책을 혼자 보고 해서 글자 아는 정도…26-7살에 검정고시 학원에라도 갈까 노력했는데 집을 한 바퀴 도는데 반나절이 걸릴 정도였어요. 학원 찾아 다녔는데 없더라구요. 전부다 2-3층이라 갈 수 있는 데 한 군데도 없고…제때 배우고 그럴 수 있어야 하는데…그래서 활동보조 못지않게 교육권도 중요하죠.

26-7살에 나왔다는 게 사회생활을 했다는 뜻이 아니에요. ‘나왔다’는 의미는 겨우 집 주위 한 바퀴 돌 정도를 말하는 거예요. 그 생활을 서른 살 될 때까지 유지했어요. 저는 그 이후에 장애가 급속도로 나아진 경우예요. 예전에는 침도 흐르고 목도 돌아가고 했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조금 나아져서 혼자 스쿠터 정도는 겨우겨우 탈 수 있는 정도가 됐어요. 다른 분들은 대단하다고도 표현하시는데 제가 장애가진 몸이지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서 조르고 졸라서 오토바이 하나 마련해서 연구를 하다가 장사를 택했어요.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장사밖에 없더라구요. 취직도 안되고. 장사를 오래했어요. 10년 가까이 카세트 테이프를 팔았어요.

그러다가 제가 장애인이면서도 장애인을 몰랐던 것, 장애인 세상을 몰랐던 걸 깨달았죠. 관심을 가졌어야 했는데……. 내가 사는 것만 고민했던 것, 지금도 안타깝게 생각해요. 좀더 알았더라면 참여를 했을텐데……. 지금 장애인들이 지하철 보면 엘리베이터 있고 경사로도 있잖아요. 그런 것들이 당연히 된 게 아니거든요. 선배 장애인분들의 투쟁을 통해 제도화된 거고, 그런 과정들이 있었는데 저는 참여를 못했는데 엘리베이터와 경사로를 이용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저도 동참하는 게 옳은 것이라는 그런 생각이 든 거죠. 그래서 제가 인터넷 보고 찾고 해서 서울에 집회 간 것이 계기가 되어서 지금까지 이어온 거죠.

1년여 년 전부터 독립생활투쟁에 전면으로 나서고 있어요. 앞으로 계획은 지금 우리나라에 일본의 자립생활이념이랄까 이런 게 도입돼서 센터도 생기고 운동들도 생겼는데 일본을 따라가지 않고 우리의 독자적인 방식, 옳은 방식으로 저희 센터를 이끌어가는 거예요. 오래 유지되고 제대로 서려면 사회의 변화에 첫째 주안점을 두고 진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 노력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