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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리1] 과거가 아닌 현재로 되살려야 할 노동자대투쟁

6월 민주항쟁 20주년은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고, 국가 차원의 기념행사도 진행되었다. 그렇지만 6월 민주항쟁을 이어 터져 나왔던 1987년 7,8,9월의 노동자대투쟁에 대해서는 정부 차원의 어떤 공식적인 차원의 행사도 준비되지 않고 있다. 민간의 기념행사도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87년의 6월의 그 항쟁과 그 이후에 일어난 그 대투쟁은 분리되어 사고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언론들의 침묵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민주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의 균열

대체로 우리 사회에서는 이 두 투쟁에 대해서 분리해서 사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민주항쟁의 역사적인 성과에 대해서는 앞 다투어 평가하고, 그 성과들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면서도 노동자대투쟁은 아직도 노동자와 민중들만이 기억하는 것으로 분리되어 있다. 단지 형식만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그 둘은 분리되어 사고된다.

6월 민주항쟁은 그 항쟁에 참여한 인원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었다.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학생, 지식인과 시민 등이 합세하였던 반독재 민주화투쟁은 군부독재의 연장을 위해 고안된 것으로 확실시되는 6.29 선언의 기만에 의해 진화되었다. 고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 백만 군중이 운집했지만, 그들은 경찰의 최루탄 진압에 쉽게 해산했다. 6월 내내 전국에서 경찰을 무장해제하면서 싸웠던 민중들답지 않게 쉽게 물러났다.

그리고 곧 울산에서부터 노동자들의 대투쟁이 시작되었다. 그 투쟁은 하루에만 3천 개의 공장에서 파업이 동시에 일어날 정도였다. 1997년 초 노동법 개악 날치기 통과에 항의하여 일어났던 총파업이 1천 개 정도였고, 그에 놀란 김영삼이 법안을 철회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초유의 대파업이었다. 지금 시절처럼 파업을 한다고 하고는 실제 공장 가동도 중단하지 못하는 그런 파업이 아니었다. 석 달 동안의 파업으로 전국에서는 해방 이후 그때까지 설립되었던 노동조합 수에 맞먹는 1천 개가 넘는 신규 노동조합이 건설되었다. 그런 투쟁의 성과는 이후 전노협으로, 그리고 오늘의 민주노총으로 계승되었다.

그런데 이미 20년 전의 민주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은 내용적으로 균열되어 나타났다. ‘독재타도, 민주쟁취’라는 민주주의적 염원은 직선제 개헌과 같은 형식적인 민주주의로 귀결되었다. 당시 항쟁을 주도했던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는 노동자대투쟁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방관했다. 운동본부의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은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쥐면서 타도의 대상이었던 민정당 세력과 함께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테이블에 앉았고, 그들의 담합에 의해서 87년 헌법은 탄생했다. 거기에는 노동자들의 요구였던 경제적 민주화, 사회적 민주화라는 요구는 최소주의적 방식으로 반영되었을 뿐이다.

민중의 요구를 배신해온 역사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은 서둘러서 투쟁전선에서 물러났고, 이후 서로 대선 후보가 되겠다면서 분열했다. 투쟁 이후를 준비하지 못했던 당시 민주화운동 세력들은 비판적 지지와 후보단일화, 독자후보세력으로 분열되었다. 그리고 노동자투쟁 대오는 이석규 열사의 장례식을 끝으로 사그라졌다. 정치세력들이 어떤 엄호도 받지 못한 과정에서 그들은 경찰의 진압 대상이 되었다. 그렇지만 노동자대투쟁은 이후 무시할 수 없는 사회세력으로서 노동자들의 잠재적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실제로 이후 사회운동에서 노동운동은 뚜렷한 주체로 성장하게 된다.

문제는 그 이후다.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노동자들의 경제적 민주화, 사회적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지 못한 것은 계급적인 한계로 인한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문제는 이후 사회변혁운동을 꿈꾸어왔던 당시의 민주화운동세력들도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비슷한 인식과 행보를 보여 왔다는데 있다. 오히려 이후의 역사는 자유주의 정치세력에 민주화운동세력이 편입되는 과정으로 나타났다.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에 맞게 개혁이라는 의제를 던지고, 그에 따라 구 지배세력과 일정한 타협을 이루면서 지배세력의 일원으로 투항하였음에도 민주화운동세력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행보를 보였다. 그렇게 철저하지 못한 인식의 한계로 인해서 단호하게 과거와의 단절을 이루지 못했고, 냉전 이후 시기에서 민주화운동을 확장시키지 못한 채 형식적, 절차적 민주화만을 구상했고, 진행했다. 그런 과정에서 구 지배세력의 정치적 복귀가 이루어졌고, 지루한 민주개혁에 식상한 민중들은 자유주의 정치세력에 등 돌리고, 사회적으로 보수적 반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것은 6월 민주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을 분리하여 사고하던 당시 운동 지도부의 한계였고, 다른 말로는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들의 요구를 배신한 결과였다.

민주주의의 내용을 재구성하자

그렇지만 노동자대투쟁을 이끌었거나 이를 지지했던 세력들의 운동도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민주화운동의 다양한 분파들은 이후 열려진 정치적 공간에서 다양하게 분화되었다. 특히 시민운동진영의 분화는 사회운동 발전의 한 양상이겠지만, 이미 민주화운동과정에서 예정되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80년대까지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세력들은 이후 노동자대투쟁에서 제출되었던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 과제를 민주주의 담론으로 수용하여 민주주의 논의를 풍부하게 만드는 일에 실패했다. 더욱이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북한의 실상이 폭로된 이후 대중들을 설득할 민주주의 담론을 제시하는데 실패했으며, 이후 합법주의적 투쟁의 방식, 합리주의적 대안의 제시라는 압박을 받으면서 정치적 대안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에 실패했고, 오히려 반대만을 위한 반대를 일삼는 불만세력으로 비추어지게까지 되었다. 심지어는 노동자대투쟁의 계승자인 민주노총은 1998년 한 해 전의 총파업 투쟁의 성과를 잃고, 정리해고에 합의해주는 것으로 인해 정치적 위상을 상실해가기 시작했다. 이후 민주노총은 대기업 노조 기득권 세력으로, 각종 비리사건으로 연루되어 도덕성조차도 의심받는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그런 뒤에 맞는 노동자대투쟁 20주년이다. 사실 노동자들에게는 우울한 20주년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IMF 이후 비정규직은 노동자들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고, 빈곤층은 늘어나고 고용불안에 시달려야 하고, 그러고도 경쟁에 내몰려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한미FTA가 본격적으로 적용되면 노동자들의 불안감은 더욱 증대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7월부터 시행되는 비정규직법으로 인해서 노동자대투쟁 20주년은 계약 해지된 비정규직들의 투쟁으로 기념해야 하는 상황이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지금 시기 노동자들이 처한 계급적 현실을 타개할 방향은 무엇인가이다. 지금까지 헌법과 국제인권조약들에 의해서 보장되어야 하는 권리로서 인식되던 보편적 상식들이 곳곳에서 이익을 기준으로 저울질 당하는 상황으로 변하고 있다. 집회와 시위의 권리에 대해서 교통의 권리를, 파업의 권리에 대해서 영업의 권리를 들이대면서 무엇보다 기업의 이익이 우선이라고 강변하는 상황이 오고야 말았다. 곳곳에서 인권은 무시되고, 후퇴하고 있다.

지금 20년 전의 노동자대투쟁을 기념하는 일은 다시금 지배세력에게 배신당하는 전철을 밟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단호하게 단절하는 것이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내용과 형식도 근본에서부터 다시 구성하는 것이어야 한다. 20년 전 배신당한 민주주의의 꿈을 노동자와 민중의 입장에서 재구성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어야 한다. 신자유주의 국가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다른 꿈과 다른 세계를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상식으로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노동자대투쟁은 미완의 투쟁을 넘어서 근본적인 변혁의 길로 잇대어지지 않을까. 6월 항쟁의 연장선에 노동자대투쟁이 있었듯이 지금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은 거꾸로 민주주의의 과제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으로 이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