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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기억하는 4.16] 세월호 참사와 죽은 이의 존엄에 관하여

[편집인 주]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겠다는 약속은 참사 당일에 벌어진 일을 복기하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된다. 4.16연대는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인권선언'을 추진하며 인권으로 4.16을 기억해보자고 제안한다. 기억은 행동이다. 세월호 참사 이전과 달라져야 한다는 열망은,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지 끊임없이 질문하는 행동이 되어야 한다. <인권오름>과 <프레시안>에 매주 공동 게재되는 연재기사가 하나의 실마리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종종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이 사회에서 죽음은 너무나도 쉽고 흔하게 일어나는 것이 되어 버렸다. 미디어에서 사건·사고로 혹은 자의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지만, 많은 이들에게 죽음은 여전히 추상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과연 타인의 죽음을 통해 죽음에 대해 그리고 죽은 이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작년 4월 16일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많은 이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깊은 슬픔을 안겨 주었다. 아마도 참사를 발생시킨 많은 원인들이 켜켜이 쌓여갔던 시간들 그리고 참사의 순간과 그 이후의 시간들 속에서 우리 사회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그동안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부인하려 했던 우리 사회의 부조리들이 거대한 해일처럼 우리 모두를 덮친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로 인해 피해자나 유가족뿐만 아니라 참사를 지켜본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는 되돌릴 수 없는 상흔이 남았다.
많은 이들이 2014년 4월 16일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바뀌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그런데 그 중 아직 논의를 시작조차 하지 못한 주제가 있다. 바로 참사로 인해 목숨을 잃은 자들의 인권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주제에 대한 논의가 진전되지 못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죽은 사람보다는 산 사람의 문제가 더 시급하다는 인식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산 사람의 인권도 제대로 보장하기 어려운 세상에서 죽은 사람의 인권 문제까지 챙길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운동의 권리 당사자가 부재하다는 문제로 이어진다. 당사자가 살아있지 않기 때문에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끌어갈 만한 충분한 동력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참사로 죽은 자들의 인권에 대한 이야기가 진척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죽은 자를 과연 인권의 보유자로 볼 수 있는가라는 복잡하고도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 아직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학자들의 논쟁은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논쟁의 소지가 다분한데다 다소 추상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여기서 구체적인 주장들을 다 소개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죽은 자를 인권의 보유자로 인정하는가의 여부와 상관없이 죽은 자의 존엄을 지키는 것, 그리고 그들을 존중하는 문제는 그 논쟁과 별개의 문제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죽은 자들이 인권을 가지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죽은 자들의 존엄성을 무시하거나 그들에게 결례를 범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자들은 죽은 자의 신체를 마구잡이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죽은 자들 역시 존엄성을 가지고 있고, 존중받아야 하기에 살아있는 자들에게는 예를 다해 죽은 이들을 대할 책임이 주어진다.

출처: 4.16 가족협의회

▲ 출처: 4.16 가족협의회


그러나 참사의 현장에서 우리는 죽은 자들의 존엄이 너무나도 쉽게 침해되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 지난 7월 발표된 세월호 참사 인권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피해자들의 시신이 얼마나 마구잡이로 다뤄졌는지, 그리고 그것이 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는지 생생하게 드러난다.

시신을 꺼내놓고 한꺼번에 시신을 내놓으면 복잡하니 순차적으로 몇 명씩 내놓는 듯했어. 처음 발견된 시신들은 갯벌, 기름 등이 몸에 묻은 채로 보여주어 누가 항의를 하니까. 얼굴 등에 갯벌 등을 닦아서 내 보내 시신 확인을 하게 했다고 하더라구. (어0태, 러시아 국적 희생학생 부모)

시신은 바닥에 놓고 확인을 하래. 영안실 찬 바닥에 놓고 확인을 하래 나보고. 검사한테 반말하면서 욕을 했어요. 넌 부모도 없냐. 당신이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우리 어머니를 땅에다가 놨냐. 근데 저만 그런 게 아니더라고요. 그렇게 하니까 거기서 속이 뒤집어진 거죠. (최민수(가명), 희생자 가족)


위 사례들에서 죽은 이들에 대한 존중이나 예의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그저 빨리 확인되어 빨리 처리되어야 할 대상에 불과할 뿐이었다. 죽은 이들 자신이 그런 상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위 사례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죽은 이는 가족이나 지인 등 살아있는 자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죽었다고 해서 연결고리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죽은 이를 어떻게 대하느냐는 것은 그들과 관계된 살아있는 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이는 애도의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이는 세월호 참사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다른 모든 참사에서도 여실히 드러난 사실이다. 그러므로 죽은 이들의 존엄성을 최대한 지키는 일은 살아있는 자의 인권과 결부된 것이기도 하다.

앞에서 죽은 이들의 권리에 대한 논의가 진척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살아있는 사람들의 인권을 논하기도 바쁜 마당에 무슨 죽은 사람의 인권에 대해 이야기하느냐는 이유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보면 죽은 자, 특히 참사로 죽은 이들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역설적으로 그 사회의 인권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일 것이다. 죽은 자의 존엄을 지켜주고 예를 다해 그 시신을 대하는 사회가 살아있는 자들의 인권을 소홀히 할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죽은 이들의 권리와 존엄에 대한 이야기가 뒷전으로 밀려서는 안 된다. 아직 개념이나 방법 등에서 모호하고 추상적인 것들이 많지만, 그것이 그 이야기를 시작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아직 우리 사회에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절차나 기준이 전무하다. 계속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죽은 이들의 시신 수습과 인도 과정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주 구체적인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피해 가족들의 고통에 우리는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죽음 이후에도 죽은 자는 살아있는 자들과 계속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덧붙임

아샤 님은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