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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최저임금, 우리 자신을 향한 질문

“한 달에 얼마 주면 그거 갖고 한 달 산다 생각했지.”

몇 년 전 청소노동자들의 노동 환경 실태를 알리는 보고대회가 있었다. 그녀는 서울대병원에서 청소일을 했다. 노동조합을 알기 전, 최저임금 같은 건 알지도 못했고, 시급 따지고 시간 따질 새도 없었다는 것이 그녀의 이야기였다. 아마도 최저임금 미만의 임금을 받는 많은 노동자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살아내야 하는 조건을 정하는 최저임금

지난달 27일은 최저임금을 정하는 법정시한이었다. 2014년 최저임금은 결정되지 못했다. 현재 최저임금을 적용받는 노동자들은 약 500만 명에 이른다.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이, 전일제보다는 시간제가, 남성보다는 여성이, 청소년과 고령층이 최저임금의 영향에 붙들려 있다. 5인 미만 사업장에서는 약 23%가, 10인 미만 사업장에서는 17%가 최저임금 미만의 임금을 받는다. 전체 최저임금 미만 노동자의 70% 정도가 10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을 한다. 그/녀들에게 노동조합은 꽤나 멀리 있을 것이다. 최저임금은 저임금을 강요당하는 많은 노동자들의 임금 협상이기도 하다.

1988년 최저임금제도가 시행되고 2000년대 들어 최저임금 인상 투쟁이 펼쳐지면서 예전보다 ‘최저임금’은 많이 알려졌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것과 받고 있는 것은 다르다. 2013년 3월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르면, 최저임금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여전히 208만 8천 명이다. 받고 있지 못할 때 달라고 하기 어려운 것도 여전하다. 일은, 시장에서 상품을 고른 후 가격을 흥정하는 것처럼 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에는 이미 임금의 바코드가 찍혀있다. 그리고 성별, 나이, 고용형태, 학력 등 수많은 차별의 선이 밀어낸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 주위로는 똑같은 바코드가 찍혀 있는 일자리들만 진열되어 있다. 그/녀들은 그 조건 안에서 먹고살 궁리를 해야 한다. 그리고 살아낸다. 삶은 질기고도 모질다.


삶을 협상해야 하는 사람들

“그 전에 일한 곳이 너무 힘들어서 돈이 적어도 편하게 일할 곳을 찾았다.”(“최저임금, 최소한 집세 내고 쌀은 사야죠”, 민중언론 참세상 2013.6.26) 최 씨가 전에 하던 일은 시급 5,500원이 넘었다고 한다. 하지만 주 6일에 12시간씩 일해야 하는 조건을 견디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는 “편하게 일했다.” 온갖 종류의 감정노동을 수행해야 하는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편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본 이들은 모두 알지만 그의 이야기를 일단 그대로 듣자. 그러나 그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선택한 대가는 “집세 내고 쌀 사먹을 정도”도 되지 않는 최저임금이었다. 세상은 편하지 않다.

누군가 자신의 삶을 기획할 때 예상 답안의 가짓수를 정해주는 것이 최저임금 제도다. 최저임금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은 생존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영양과 칼로리를 정해준다는 의미 이상이다. 최저임금은, 조금 넓은 반지하 방에 살지, 창은 없지만 지층에 있는 고시원에 살지를 고민하게 하는 것이다. 아플 때 반장에게 굽실거리며 잠깐의 시간을 얻어 병원에 들러야 할지 일단 참아봐야 할지 결단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잔업이나 특근을 기다리며 수입의 불안정을 견딜지, 아예 매일 야간에 일하기를 선택할지 강요하는 것이다. 최저임금 선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협상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녀들은 자신의 삶을 협상해야 한다.

최저임금 안에서 살아라, 너희들은 그렇게 살 만한 사람들이다, 라는 ‘합의’가 최저임금 제도를 통해 만들어지고 있다. 물론 최저임금 제도는 어떤 일이 최저임금을 받을 만한 일인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최저임금이 영향을 미치는 업종, 그런 일을 선택하게 되는 사람들은 불평등의 구조 속에 이미 지정석을 얻고 있다. 최저임금 제도가 사회적 모욕이 되지 않으려면 최저임금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쓰여야 한다.


‘줄 수 있는 만큼’이라는 틀을 버려야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할 때마다 경총을 비롯한 재계와 정부는 우려를 표한다. 영세사업장들은 지급할 능력이 없고 오히려 고용이 위축될 것이라고 한다. ‘줄 수 있는 만큼’에서 출발하는 것, 이것이 현재 임금제도의 근본적인 문제다. 최근 통상임금 논란을 계기로 ‘임금제도개선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은 임금제도 개편의 방향으로 직무급, 성과급으로의 전환을 제시했다. 임금제도개선위원회는 최저임금제도 개편도 논의 과제로 삼고 있다. 고용주가 ‘줄 수 있는 만큼’을 임금의 기본조건으로 전제한다면, 임금제도가 어떻게 개선되든 노동자를 위한 것이 될 수 없다. 어차피 ‘줄 수 있는 만큼’에서 급여의 명세가 달라질 뿐이다.

‘받아야 할 만큼’에서 출발해야 한다. 앞서 인용한 인터뷰의 최 씨는 시급 5,500원을 받고 했던 일이 시간당 7,000원은 받아야 하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내가 받을 만한 돈’이 얼마인지 가장 잘 아는 것은 자신이다. ‘최저임금 1만 원’이라는 주장이 그렇게 틀을 바꾸자고 한다. 저임금 노동자들은 ‘내가 왜 그것만 받아야 하는지’ 물어볼 수 없었다. 이제는 뒤집어야 한다. “왜 시급 1만 원을 줄 수 없는지” 사회가 대답해야 한다. 이 질문은 개별 고용주를 향한 것이 아니다. 누구라도, 어떤 상황에서든 일을 해서 받을 만한 몫이 얼마인지로, 질문을 바꿔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서로 받을 만한 몫을 나누기 위한 방안을 모색할 수 있다.

“자영업자들이 영세한 이유는 최저임금 때문이 아니라 높은 임대료와 대기업의 불공정거래 관행, ……”이라고 밝힌 지난 24일 영세상인들의 기자회견은 함께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실마리를 준다. 중소영세사업장들이 파견업체에 수수료를 얹어주면서 노동자들에게 저임금을 강요하는 것 역시 함께 되짚어보며 바꾸어야 할 현실이다. 우리가 ‘받아야 할 만큼’의 몫이 ‘있다’는 인정이야말로 이 모든 것의 출발선이다. 오는 4일 다시 열릴 예정인 최저임금위원회 전원회의가 서야 할 출발선이다.


‘사람다움’에 대한 질문

“남의 돈 벌기가 어디 그렇게 쉽나.”라는 말은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게 만든다. 누군가 먹고살기 위해 필요한 돈이, 누군가 일을 해서 벌어들인 돈이 ‘남의 돈’이 되는 현실은 당연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다. ‘노동력’을 사고 돈을 주는 자, ‘노동력’을 제공하고 돈을 받는 자라는 구분은 현실에 존재하는 계약 관계를 설명하는 익숙한 틀이다. 그러나 ‘노동력’이 사람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은 어떤 임금제도도 인간의 존엄을 보장하는 데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근원적 조건이다. 우리는 ‘임금’ 너머를 봐야 한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외침이 인권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사람다움’은 누가 대신 정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저임금이 1만 원이라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노동시간, 하루의 일과, 휴식을 즐기는 방법, 친구나 가족들과의 관계,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보는 역량, 이웃과 서로 기대어 사는 방법……. 최저임금 1만 원이 열어주는 상상력을 저임금 노동자들만의 것으로 미뤄두지 말자. 거기에 ‘사람다움’에 대한 질문이 숨어 있다. 최저임금이 모두의 싸움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사람다움’이 무엇일지 답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