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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모처럼 새해 계획

새해가 밝았네요. 2009년은 용산에서 시작해 용산에서 끝난 것 같은 한 해였어요. 하루하루를 돌아보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는 한 해였죠. 인권운동사랑방을 후원해주시는 여러분들은 또 어떻게 2009년을 돌아보실지 궁금합니다. 연말의 4대강 예산안, 노동관계법 날림 통과까지 숨 가쁜 한해였지만 다시 해는 밝아오고 있네요. 새해 소망들은 곱게 피워 올리셨는지요.
저는 아직 새해 계획을 만들지 못했어요. 농담처럼, 계획을 만들어 사는 걸 계획으로 세워볼까 한다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계획이라거나 소망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연초에 꼽아봤던 적도 있지요. 한 달에 책을 몇 권 읽어보자,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서 운동을 하자, 사람들을 만날 때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더욱 궁금해 하며 얘기를 잘 들어보자, 내가 먹고 마시는 거 조금 더 찬찬히 살펴보면서 먹는 거든 쓰는 거든 쓰레기를 최소한으로 만들자, 집에서 청소하고 빨래하는 일을 더 즐겨보자, 사람들에게 가끔 엽서를 쓰자, 주말에는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며 요가를 해보자, 돈을 쓸 때 한 달 지출을 염두에 두며 아껴 쓰자, 일요일에는 늦잠을 자고 늦잠 자다가 일어나면 음악을 듣고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다가 밖에 나가 혼자 놀자, 뭐 이런 것들이 예전에 다졌던 마음들인 것 같아요. 하지만 늘 한해를 마무리할 때쯤엔 괜히 민망하기만 했던 게 새해 계획이었죠.
아침에 눈을 뜨면 사무실로 나와서 컴퓨터를 켜고 전화를 받고 메일을 확인하고 이런저런 사무적인 일들을 처리하고 글을 쓰거나 회의를 준비하고 이런저런 소식들을 살펴보다가 저녁에 회의를 하고 나면 밤이 됩니다. 매일같이 이렇게 바쁘기만 한 건 아닌데, 또 지내다 보면 뭔가를 늘 하고 있게 되기도 하지요. 습관이랄까. 이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해가 갑니다. 그러면 뭔가 허무해지지요. 인권의 가치가 실현되는 세상을 만들겠다며 하는 일들인데 세상이 좋아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몸은 몸대로 빌빌대고 마음은 마음대로 지치기도 하고요. 그러니 새해 계획이라는 것이 얼마나 민망합니까. 결국 하루하루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이르고 나니 새해 계획을 세우지 않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새해의 계획이나 소망이라는 것조차 생각해보지 않은 채 한 해를 보내니 한 해를 돌아보기가 난감하더라고요. 나에게 이 한 해는 어떤 해였는지. 그러다가 괜찮은 목표를 하나 발견하게 됐습니다. 헤헤. 연말에 책을 좀 읽었는데 그 중 하나가 신화에 대한 책이었어요. 세계의 다양한 신화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려주는 책이었지요. 이집트 신화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으시죠?
많은 지역에서 죽음과 부활은 신화의 주제이고 죽은 이후의 세계나 죽음을 관장하는 신은 빠지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을 때 동전을 함께 묻는다거나 며칠 치 식량을 함께 묻는다거나 하는 풍습이 생기기도 했답니다. 고대 이집트의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42명의 신 앞에서 42가지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증언하는 절차를 거치게 된다고 믿었대요. 미라를 만들게 된 것도 그런 절차를 거친 영혼의 부활을 돕기 위해서이지요. 죽은 자는 오시리스가 기다리는 커다란 심판의 방에 이르게 되는데 거기에서 부정고백을 한 후 심장을 저울에 올려놓는답니다. 저울의 반대쪽에는 마아트 여신의 깃털이 올려져 있는데 죄와 악행 때문에 심장이 만약 깃털보다 무겁다면 구원의 기회를 잃고 암무트라는 괴물에게 먹힌다고 합니다. 이 절차에 대비하기 위해 <사자의 서>가 만들어졌습니다. 진실의 깃털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글이지요.
그 중 인상 깊었던 구절이 두 가지 있었어요. 친구의 재산을 빼앗지 않았다거나 악한 일을 하지 않았다거나 굶주리게 하지 않았고 어떤 사람도 울리지 않았고 살인하지 않았다는 등의 고백은 다소 평범하지요. 그런데, “저는 없는 것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저는 매일 제가 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서서 일하지 않았습니다.”라는 두 문장에 한참 눈길이 머물더군요. 이 문장들이 어떤 맥락이나 배경에서 나온 말들인지는 전혀 모릅니다. 그래서 제멋대로 해석한 결과이기는 하지만 한 해 동안 쥐고 있어볼만한 말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없는 것을 배우지 않겠습니다. 내가 배우고 느끼고 알게 되는 것들은 나의 능력이 뛰어나서 배우게 되는 것들이 아니라 누군가에게서 온 것이라는 점을 잊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내가 전혀 모르는 어떤 사람일 수도 있고 사람이 아닌, 동물이나 식물, 하늘에 떠가는 구름일 수도 있겠지요. 서로 배우는 관계로 세상의 모든 것들과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모든 것이 각자의 생명과 존재를 키워가는 모습이,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은 아닐지요. 왠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소중함도 더욱 깨닫게 되지 않을까 싶어졌어요.
저는 매일 제가 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서서 일하지 않겠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뒤쳐질 거라며 불안을 유포하고, 기본적인 생활도 보장하지 않으며 삶을 위협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과로로 건강을 잃게 되거나 친구를 잃게 되는 일도 곧잘 있지요. 인권활동가라고 많이 다르지 않은 듯도 해요. 하루에 일할 수 있는 시간의 한계가 있는데, 미련한 욕심이 밤을 새게 만들기도 합니다. 적어도 이런저런 욕심으로 나를 소진시키며 운동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 각자 행복해지는 게 어쩌면 세상을 바꾸는 가장 확실한 전략일 수도 있지요. 그만큼 행복해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기도 하고요. 인권운동하면서 행복해야잖아요? 그러니 할 수 있는 만큼만! ^^;; 하지만 우리에게는 미처 깨닫지 못한 능력들이 잠들어있다는 걸 믿어요. 그걸 깨워내기 위해서라도 매일 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서서 일하지 않기로!
모처럼 새해 계획을 세워보니 든든해집니다. 물론 한해는 또 여느 때와 비슷하게 흘러가고 지나가겠지요. 하지만 하루하루 중 어느 하루도 똑같은 하루가 없다는 것 역시 분명합니다. 오늘 만들어갈 삶의 이야기, 늘 재밌고 행복하게 써나가야죠. 후원인 분들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건강하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