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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점집에서 건진 교훈, ‘피할 수 없다면 즐겨!’

일 년에 한두 번 볼까말까 한 고향 친구들과 함께 해운대로 여행을 갔다. 몇 년 만인지! 2008년 마지막 날에 만난 우린 2009년 해를 함께 맞을 작정이었다. 난 2009년 해님한테 빌 것(들)이 있었다. 의뢰받은 것도 있었고... 새해 첫날 새벽 공기는 상쾌했다. 큰길로 접어들자 골목골목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큰길에서 한 줄기를 이뤄 좀비마냥 해변을 향해 우르르 몰려가는 것이 보였다. 긴 행렬이었다. 멀리서 볼 때는 좀 무서웠는데 막상 그 행렬에 합류해서 사람들의 싱글벙글한 표정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속도를 점점 높여 걸으면서 마스크, 장갑, 목도리를 하나 하나씩 벗고 점퍼 지퍼까지 내릴까 고민할 때쯤 우린 해변에 도착했다. 우린 해님을 감격스럽게 맞아줬다. 발꼬락에 잔뜩 힘을 주고 까치발로 서서는 목을 쭉 뽑아낸 채로! 하지만 두 손만은 가슴 앞에 꼬~옥 모아서!

아침에 해도 보고, 소원을 기가 막히게 들어준다는 절에 가서 절과 함께 작은 성의 표시도 했지만 왠지 성에 차지 않았다. 올해 서른넷! 좀더 어렸을 때, ‘이런’ 서른넷을 꿈꾸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렇다고 뭐 딱히 청춘을 받쳐 달렸던 꿈도 없었다. 그냥 평범하게 돈 벌고, 타인의 고통 앞에 내 한 몸 죄책감 덜 수 있을 정도로 활동하고, 적당히 문화생활 즐기고 그냥 그러자 했다. 그런데 ‘그냥 그러자 했던 것’이 어느 날 갑자기 날 우울의 세계로 인도할 줄이야!!! 서른넷을 향해 달려가던 서른셋 가을 무렵에. 나란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느꼈다.

이틀 동안의 장고 끝에 나는, 남들 못지않게 요란하게 새해를 맞고도 뭔가 성에 차지 않은 것은 내 존재에 무게를 실어줄 그 뭔가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 다음날 나는 내 오랜 친구의 인생 카운슬러라는 ‘심불산님’을 찾아갔다. 그 친구는 주변의 많은 지인에게 그 점집을 소개시켜 주는 바람에 급기야 최근에는 브로커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 처지였지만 나를 위해 기꺼이 동행해주었다. 

점집에서 나는 두 가지에 놀랐는데 하나는 심불산님이 생각보다 훨씬 잘생긴데다가 내 운을 풀이해주시는 데 한 시간 반이나 할애해 주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도 몰랐던 내 절친의 연애사를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 시간 후 점집을 나올 때 기분은? 음... 위로 받은 느낌이랄까 체했던 것이 내려간 느낌이랄까 그랬다. (참! 심불산님이 자꾸 궁금한 게 없냐고 물어보셔서 이명박이 임기를 모두 채우겠냐고 물어봤는데 꽉 다 채울 거란다. 우씨~)

한 십년 전에 그날 들은 나의 ‘운’에 대해 들었다면 난 무지 실망했거나 괜히 돈만 날렸다고 불평했을지 모르겠다. 중년에 성공할 수라거나 애인과 궁합이 좋아 알콩달콩 행복을 누릴 수라거나 재물복을 타고 났다거나 하는 말은 고사하고, 하다못해 몇 년 몇 월부터는 막혀있던 운이 트일 것이니 기다려 보라거나 동쪽으로 가면 귀인을 만날 거라는 등의 얘기도 못 들었다. 
그냥 지금을 받아들여야 한단다. 지금까지 애쓴 일들에 회의가 들고, 이루어 놓은 것도 하나 없어 주눅이 들고, 인정해주는 사람 하나 없어도 그냥 지금 있는 자리에 그대로 있으란다. 적어도 올해까지는. 동전 호호 불어가며 경품 스티커 긁었는데 ‘다음 기회에!’가 나왔을 때처럼 참 맥 빠지는 얘기.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가 지금 있는 자리를 좀더 따뜻하게 보듬을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피어나는 것 같았다. 변화를 원한다면 지금 내 자리에서 시작해야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나 할까. 비정규직 시간강사, 사랑방 활동을 시작한지 올해로 10년이 되었지만 ‘인권’의 관점으로 무엇을 해석해보라 하는 주문을 제일 공포스럽게 생각하는 처지(물론 그런 주문도 일년에 한번 받을까 말까 하지만), 같은 사람과 연애 5년째이지만 가끔 그 사람의 백만 분의 일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외롭고, 기타를 배운지 3개월이 다 되어 가지만 끝까지 연주할 수 있는 노래가 한 곡도 없어 내 비천한 예술적 재능에 절망하는 게 나. 이 자리에서 다시 일 년을 살아갈란다. 최대한 멋있게!

‘피할 수 없다면 즐겨!’ 작가 공지영이 어느 책에서 한 말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봄직한 뻔 한 말이기도 하지만 2009년 첫 겨울에 들으니 그 울림이 길다. 

추신1. 사실 서른셋을 마지막으로 사랑방을 그만두려고 했다. 근데 올해는 그냥 있을란다. 

추신2. 수돗물 민영화 저지 활동 관련 보고 차원에서 이 글을 쓰라고 주문받았는데 그만 밑도 끝도 없는 개인적인 넋두리를 늘어놓고 말았다. 소중한 지면을 이렇게 써서 미안합니다.
참고로 사회공공성팀은 수도법 개악 및 상수도 민간위탁 저지에 관심있는 분과 서명이나 엽서운동으로 활동에 동참해주신 분들께 이메일로 활동경과와 계획을 보고하고 있는데 관심 있으신 분은 waterforall2008 @gmail.com으로 메일 한 통만 보내 주세요. 언제나 환영입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