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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밀양 2013년 10월 1-2일 행정대집행 첫날의 기록 - 끝나지 않는 ‘하루’

이글은 인권활동가 감시단의 일원으로 이틀 동안 겪은 일을 그냥 적은 것입니다. 언론과 속보를 통해 많은 사건이 전해지고 있지만 각자의 눈으로 본 것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밀양에 계신 어르신들의 상황을 전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요.


9월의 마지막 밤. 행정대집행이 내일이냐 모레이냐 설왕설래다. 한전 측의 약속도 있고 여러 정황도 있고 하여 1일은 아닐 거라는 예상이 우세했다. 서울에서 한전 서울본부 앞 집회가 예정돼있었다. 을지로역 6번출구를 을지로 6가로 알고 간 나는 헤매다 허탕치고 돌아와서 인권활동가 감시단을 기다린다는 문자메시지를 여러 차례 받았다. 할 일은 많고 갈 길은 멀고 상황은 예측불가니 망설여진다. 그래, 일단 가보자.

101, 오후 4시쯤 6명의 활동가가 밀양 너른마당에 도착했다. 대책위 간사는 정신이 없어서 말을 나누고 지시를 받기 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우린 집행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두 곳으로 나뉘어 들어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밀양시청에서 이계삼 선생님을 잠깐 스쳤다. 선생은 끊임없이 통화를 해야 했기에 인사조차 나눌 틈을 찾을 수 없었고, 우린 서로가 탄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인사를 대신했다. 우릴 태워다준다던 간사님도 농성장에 넣을 물품을 사러가는 게 더 급하게 돼서 우린 택시로 갈아탔다. 목적지는 평촌마을. 마을 입구에 경찰차 7대 정도가 서있다. 평온한 산골 마을에 정말 안 어울리는 물건이 아닐 수 없다.

산으로 들어서는 길목엔 주민들이 바리케이트를 쳐놓고 앉아계셨다. 바리케이트 위 나무에는 목을 맬 수 있게 줄이 서너개 매 있었다. 교수형 집행을 준비라도 한 듯 동그랗게 매듭진 줄이었다. 섬뜩했다. 공사현장은 다 산꼭대기에 있다. 여기서 구불구불 산길을 타고 한참을 가야한다. 트럭을 타고 한참을 갔다. 트럭에서 내려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면 움막이 있다. 움막 앞에서 한 할머니를 뵈었다. 두 번 정도 뵌 분이었는데 인사를 하니 내 손등에 반갑다고 뽀뽀를 해주셨다(다음날 그 할머니가 쇠사슬로 몸을 감은 사진이 언론에 나왔다. 팔십대인 분이다). 너무 말라서 팔을 잡으면 마른 장작같이 느껴진다. 아니 성냥개비 같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할머니가 짚고 있는 지팡이가 할머니 팔보다 굵어 보인다.

인터뷰를 하는 분, 밥을 짓는 분, 정신이 없다. 움막 바로 밑에 말로만 들었던 관 자리가 파있었다. 아주 깊게 파있었다. 그대로 뛰어들어 우릴 여기 묻어 달라 하실 것 같다. 그런 상상을 하니 구덩이가 너무 무섭다. 기자들이 그 관 자리를 열심히 찍어댔다. 관 자리를 들여다보는 순간 역한 냄새가 났다. 냄새의 정체는 된장국이었다. 환기가 안되는 움막 안에서 할머니들이 끼니를 들고 계셨다. 관 자리 앞 움막에서의 식사는 처연했다. ‘지금 안 먹어두면 다음 끼니가 언제 될지 모르니 먹어두라’는 할머니의 ‘명령’에 억지로 밥을 먹었다. 만약을 대비해 큰 물통을 채워놓고 그 물로 밥을 지으신 것이다.

주민들에게 따로 질문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분들은 계속 말씀을 하셨다. 기자들 뒷통수에 대고 허공에 대고 또 그 무엇에 대고 계속 말씀을 하셨다.

기자분들, 이번에는 좀 똑바로 보도해서 언론의 명예를 회복하세요.”

당신들, 이 괴로움을 알아? 평생을 같이 살아온 이웃들이 갈라져서 인사도 못해. 길에서 마주쳐도 찬성 쪽 반대 쪽이라 서로 못본척 하며 지나가야 한다고. 그 고통을 알아? 난 그게 제일 괴로워”

지긋지긋해. 이런 상태론 더 못살아. 이번엔 끝이 났으면 좋겠어. 우리가 죽으면 끝이야. 그게 끝이야.”

우리 할매들을 왜 이렇게 못살게 구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어.”

국책사업이라매? 그럼 가장 돈 안들게 직선으로 긋던지. 왜 경북은 제끼고 지주들 사는데 제끼고 힘센 놈 있는데는 제끼고 우리처럼 힘없는 사람들 있는데로만 선로를 그었대?”

보세요. 여기 산이 얼마나 좋아요? 자연이 이렇게 좋은데, 그게 귀중한 줄 모르고 그렇게 망쳐서 어쩌려구?”

어둑해졌는데 7시 정도밖에 안됐다. 깜깜할 때는 사고 날까봐 안쳐들어올거라고 새벽에 칠거라고 예측들을 하셨다. 그럼 새벽이 올 때까지 이 상태로 대기해야 한다. 멍하니 하늘만 보고 있다. 갑자기 누군가 소리쳤다. “불 다 꺼봐! 저기서 후레쉬가 비쳤어.” 움막 뒤 산 속을 가리켰다. 정말 후레쉬 불빛이 휙 선을 그었다. 세 번 정도 산 뒤로 쳐들어온 일이 있다고 했다. 할머니들은 산 속을 향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 이 개눔들아. 나와. 나오라구.”

그 소동이 지나고 나자 할머니 몇 분이 비탈길을 올라오고 계셨다. 잠시 집에 다녀오시는 분들이었다. 대부분 평지를 걸어다니기도 힘들 몸인데 지팡이에 의지해 비탈을 오르셨다. 그리고 움막에서 밤을 지새셔야 한다. 할머니 30여분 정도가 다 주무시기에 움막은 좁았다. 60대 중반 쯤 되시는 분들(여기선 아주 젊은 축에 든다)이 밖에다 스티로폴을 깔고 누우셨다.

멀쩡한 집 놔두고 우리가 이렇게 매일 노숙을 한다.” 누우신 할머니가 한탄하신다. “풀벌레소리에 별보며 자는 것도 괜찮재?”

, 저희도 노숙이 전문이예요. 괜찮아요.”

인권운동연대 활동가 아요가 그렇게 대답했다.

자녀분들이 걱정하시겠네요.” 옆에 계신 분께 물었다. “그렇죠 뭐. 송전탑이 이미 있는 마을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자식들이 부모 보러 고향에 안온대요. 전자파 무서워서. 부모들이 자식 보러 가지 않으면 만날 수가 없대요. 생이별인 거죠.”(밀양이 고향인 후배에게 이 대화를 얘기해줬더니 자기도 송전탑이 세워지면 아들 데리고 여길 못 올 것 같다며 그 말이 실감난다고 했다.)

산의 밤은 갑자기 추워졌다. 바람의 냉기가 날 세운 칼같다. 게다가 9시밖에 안됐는데 잠이 올 리가 없다. 경사진 비탈길에 스티로폴을 놓았기에 자꾸 몸이 미끄러진다. 미끄러지면 기어오르기를 반복해야 한다. 밤새 등산하는 기분이다. 이슬인지 비인지 헷갈리는 비도 내렸다. 금새 모든 것이 축축해졌다. ‘해가 뜨길 기다려야 하나? 해가 뜨면 쳐들어올텐데? 어느쪽이 더 좋은거지?’ 자문하는 밤은 길고 길다.

우리 발밑에 누우신 할머니들은 상황을 공유하는 전화 때문에 자다가도 계속 깨셔야 했다. 그렇게 뜬 눈으로 새운 밤이 가고 새벽 4시가 됐다. 할머니들은 그 시각에 일어나서 만반의 준비를 하셨다. 콩나물국밥을 끓여 식사를 하시고 끈으로 서로의 몸을 묶는 것이었다. ‘지금 안 먹어두면 오늘 하루종일 먹을 가망이 없을거’란 명령을 이번에는 듣지 않았다. 화장실 가는 것이 배고픔보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할머니들은 움막안에 요강을 여러개 두고 계셨고, 움막 옆에 만든 변소가 있었다. 그 변소는 너무 얕게 파서 소변이 사방으로 튈 지경이었다. 산 속이라지만 보는 눈들이 많으니 눈에 안 띄고 볼일 보기가 여의치 않다. 할머니들도 숱한 보는 눈 속에서 볼일 보시긴 아주 불편하실 것이다.

어둠 속에서 닥쳐올 일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기다린다. 해가 뜨려면 아직 멀었다. 시간은 정말 가지 않는다. “이렇게 사는 게 정말 지긋지긋하다. 피말리는 일이야. 차라리 빨리 닥쳤으면 좋겠다.” 할머니의 말이 맞다. 기다리던 ‘상황’(침탈)이 오든 오지않든 피말리는 건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런 피말림이 벌써 몇 년간 계속돼 온 것이다. “이번엔 끝장을 보고싶다”는 할머니의 말이 뭔 뜻인지 알 것같다. 일상이 고문이다.

뭔 일을 벌어지길 기다리던 기자들이 ‘상황’이 오지 않자 하나 둘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문득 죽음을 기다리는 까마귀가 연상된다. 지금의 이 피말림은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상황’이다. 이거야말로 정말 중대한 ‘상황’이 아닌가? 꼭 경찰과 몸싸움을 하고 노인들이 쓰러져야만 ‘상황’인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 상황이 온다면 그건 파국인 것이다. 상황은 너무 오래 지속돼왔고 지금 이순간도 계속되고 있다.

비가 내린다. 누군가 나무를 주워다 불을 지폈다. 빗속에서도 불은 활활 탔다. 하염없이 그 불꽃만 쳐다보고 있는데 아무리 있어도 시계는 제자리다. 이제 겨우 6, 이제 겨우 65......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먹고 싸는 것 밖에 없어요. 마냥 그렇게 대기하는 거예요.” 내 지루한 표정을 읽었는지 한 지킴이가 그렇게 말을 한다.

동이 텄다. 다른 곳들에서 집행이 시작됐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할머니들이 분하다는 듯 말씀하신다. “이놈들이 우릴 쳤다간 큰일 치를 줄 알고 나중으로 미루는 게야.” “맞아. 약한 곳부터 치는거야.” “조금씩 진을 빼려는 작전이구만. 나쁜 놈들.” “기자들 빠져 나가고 나면 해치우려구 그러는 거야.” 그랬다. 이곳은 그동안 워낙 쎄게 싸워서 집행을 하면 큰일을 치를 수 있다는 걸 저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행정대집행 예고 시간은 오전 11시다. 그 시각 까지는 이곳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내 생애 가장 긴 오전시간이 가고 있다. 수십개의 나무토막이 숯이 되고 재가 되도록 9시도 되지 않는다.

드디어 11시가 지났다. 다른 곳에서 충돌과 부상 소식이 전해온다. 그곳으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사를 드렸다. “아무것도 못하고 가서 죄송합니다.” “무슨 소리, 이렇게 같이 있어주는 게 최고지.” 할머니들은 그렇게 우리를 보내며 ‘인권감시단’ 조끼를 벗어서 안보이게 넣고 가라 하셨다. “인권단체가 가버린 걸 알면 저것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기자들과 인권단체 있으면 저것들이 조심하는데 없으면 함부로 한다.” 아쉽고 아쉬워하신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트럭을 운전해주셨다. 비 때문에 산길에는 안개가 자욱하다. 트럭을 기다리는 동안 꼭 토토로에 나오는 버스가 등장할 것 같은 길이라는 생각이 했다. 그렇게 깊고 아름다운 골짜기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명랑순정만화가 초특급 공포영화로 둔갑했다. “하루에 몇십번씩 이길을 다니세요?” “그렇죠. 수십번씩 다니죠.” “힘드시겠어요.” “그게 힘든 게 아니라 농부가 일을 해야 하는데 이러고 있으니 나랏일이 한심한거죠.”

그렇다. 지금은 한창 농사철이요 수확을 해야 할 때다. 감과 밤을 실어날라야 할 농부의 트럭이 이런 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잠시 침묵하던 그 분이 힘주어 말씀하신다. “핵 문제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일본에서 벌어진 것 보고도 사람들이 경각심이 없어요.”

이번에는 고립돼 있다는 상동마을의 어딘가로 갔다. 산골짜기의 마을회관에 갔더니 주민분들은 없고 경찰들이 마을회관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있다. 경찰차가 마을을 꽉 채웠다. 농성장에 올라가지 못하고 중간에 내려왔다는 주민 세 분이 한 귀퉁이에 앉아 계시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경찰들만 왔다갔다 한다. 완전히 경찰들의 마을이다. 주민들은 농성장에 새벽 3시에 올라가셨다 한다. 천막도 없는 산비탈이라 했다. 우리가 갈 수 있냐고 여쭤봤더니 길도 없는 산이고 비와서 미끄러워 올라갈 수 없다 하셨다. 그때 국가인권위 조끼를 입은 사람 둘이 내려왔다. 상황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별일없이 서너시간 대치 중이라 자기들은 딴 곳으로 간다고 했다. 아주 심드렁한 말투여서 더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시청 직원이란 자가 따라 다니면서 어디서 왔냐고 꼬치꼬치 물었다. 당신한테 답할 의무가 없다고 했더니 ‘귀빈들이 오셨으니 자기도 정보를 구해야’ 한단다. “우리 할매들을 왜 이리 괴롭히는지 모르겠어요.”란 말을 반복하시는 할머니를 보며 해야 할 바를 모르겠는 우리는 돌아나올 수밖에 없었다.

너른마당에 되돌아가서 다음 지시를 받으니 금곡 4공구 앞 농성장에 김밥을 배달하라 했다. 하지만 도착해보니 그곳엔 이미 두 번의 김밥배달이 있어서 다들 먹은 후라 했다. 행정대집행의 대표적 농성장이라 기자들도 많고 국회의원도 있고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도 많았다. 역시나 딱히 할 일이 없어 다시 너른마당으로 복귀. 다른 마을에서 돌아온 활동가들과 만나 그때까지의 상황을 공유했다. 긴 회의를 하고 나서도 아직도 오후시간이다.

하루가 왜 이리 긴 거야?’ 우리는 이 말을 여러번 주고 받았다. 그런데 이 ‘하루’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확인해보니 행정대집행 문서에는 시작일은 있지만 끝나는 날은 명시돼 있지 않았다. ‘종료시까지’로 돼있다. 불안하고 초조한 피말림과 충돌과 상처로 점철된 ‘하루’가 그 ‘종료’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 ‘종료’가 과연 어떤 종료가 될까? 과연 어떤 종료여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