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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인 인터뷰

원칙 없는 원칙주의자가 사는 법

허진선 님을 만났어요

국가보안법 폐지는 인권운동의 오랜, 중요한 숙제지만 맡아서 활동하는 이가 적은 분야이기도 합니다. 국가보안법이 8번째 위헌심판 중인 지금,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국가보안법 폐지 TF에서 활동하는 허진선 님을 만났습니다. 서로에게 인복이 되어주며 오래오래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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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사무처 활동가 허진선 님

민변 활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어요?

중소기업을 다니고 있었어요. IT회사였는데 개발자들이 보기 어려운 부분을 제 시선으로 발굴하면 좋겠다고 회사에서 제안했고 저도 하고 싶어서 갔어요. 기획사업팀에 배치된다고 했는데 출근 첫날 영업팀으로 보내더라고요. 영업팀에서 먼저 적응하라고. 회사 설명이 수긍되는 부분도 있어서 갔는데, 거기서는 뭘 제안해도 다 반려하더라고요. 반려하면서도 아이디어를 보태며 같이 만들어갈 수 있을 텐데, 안 된다, 다시 해와라, 안 된다, 다시 해와라, 이런 식인 거예요. 업계와 회사 현실에 맞는 기획안이 필요하다는 말만 하고 함께 사업을 만들어가는 분위기는 아니었던 거죠. 달라지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나올까 고민하던 차에 민변을 소개받았어요. 그때는 사회운동이라는 개념 자체를 모를 때고 옳은 일을 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만 있을 때였어요. 친하고 존경하는 지인이 소개한 곳이라 믿고 가도 되겠다 싶어 지원했어요. 운 좋게도 합격을 해서 2018년 3월부터 일을 시작했어요.

민변에서 맡고 있는 일을 간단히 소개해주세요

사무처 소속으로 출판홍보팀을 맡고 있어요. 회원들에게 뉴스레터를 보내고 홈페이지 개편을 계획 중이고 기관지 <민주사회를 위한 변론> 기획을 해요. SNS 관리도 제가 해요. 근데 관리를 안하는 게 관리예요. 민변이 ‘재미있게’ 하려면 안 되더라, 어설프게 할 거면 하지 말자. 이게 SNS 관리 모토거든요. 위원회로 미군문제연구위원회, 통일위원회, 국가보안법 폐지 TF 맡고 있고요.

한반도 분단 상황과 관련된 이슈들이라 어려운 점이 있겠어요

분단 상황이 벌써 70년이 넘다 보니 분단을 자기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게 지금 한국사회인 것 같아요. 분단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꺼낼지 어려울 수도 있지만 저는 단순하게 생각해요. 나 북한 드라마 궁금하고 어떤 영화가 있는지도 궁금하다. 그런데 이런 질문이 위험하다고 여겨지고 북한 책을 실제로 읽으면 문제가 되잖아요? 그러니 드라마나 영화 같은 얘기를 해도 사람들이 얼마나 공감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민변은 변호사 단체이기도 하잖아요. 시민들이 공감하게 하는 역할까지 민변이 해야 할까, 할 수 있을까 애매해요. 운동에도 활동 분야에 따라 다양한 운동이 있는데 민변은 모든 걸 다 하는 단체이자 변호사 단체라는 특수성이 있어요. 그냥 통일운동 단체였다면 풀 수 있는 방법이 더 있을 텐데 법률가 단체로서 접근하는 방식을 고민하려니 어려운 점이 있어요.

최근 국가보안법 위헌심판에서 첫 공개변론이 있기도 했는데요, 사람들에게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대학 다닐 때 총학생회 선거를 하는데 누가 포스터를 보더니 '뭐야 빨갱이네' 하면서 지나가더라고요. 사회적으로 종북몰이가 심하던 때기도 했어요. 니가 우리편이라는 걸, 북한이라는 적의 편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 사회구성원으로 인정하겠다는 분위기. 창피한 얘기지만 저도 몸을 사렸던 것 같아요. 나의 진보는 북한의 사상과는 다른 거라고 표현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종북몰이 자체가 문제라고 말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후회됐죠.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전시회는 이걸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됐어요. 사람의 생각을 제한시키고 이분법에 가둬버리는 것이 국가보안법이다. 국가보안법 사건 피해자들의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우리 생각에서 북한을 지우는 것, 각자의 상상과 생각을 제한하고 서로 검열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모두의 문제라는 거요. 국가보안법은 제정될 때부터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고 74년째 논쟁이 되어왔어요. 그동안 사회가 많이 바뀌어서 북한도 남한도 74년 전의 나라가 아니에요. 어떻게 평화를 구축해나갈지 이야기해야 할 때인데 시작조차 못하고 있는 셈이죠. 북한과 열린 대화를 할 수 있을지, 평화와 대화라는 관점에서 국가보안법을 볼 필요가 있어요. 우리 모두가 당사자가 될 수 있고, 되고 있는 법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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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박물관 전시회 중 ‘여성서사로 본 국가보안법’ 파트에서 구술집을 읽고/듣고 있다.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온라인 전시_https://dhrm.or.kr/online-exhibit)

민변에서 활동하면서 가장 즐거웠던 기억을 하나 떠올려본다면?

하나를 고르는 건 너무 어렵고요, 언제 해도 즐거운 게 있어요. 상근자들이랑 간식 먹을 때! 일하다가 오후 4시쯤 되면 상근자 채팅방에 글이 올라와요. ‘당 떨어졌는데 피자 시킬까요?’ ‘뭐 시원한 거 사다 먹을까요?’ 간식 놓고 모여서 우리끼리 아는 싱거운 농담 하면서, 일 얘기 안 하고 시간을 보내면 그게 참 달달해요. 일을 계기로 여기저기 다니게 되는 것도 즐거워요. 제가 출근 이틀째 되는 날 오키나와로 출장을 갔답니다. 처음 보는 분들과 오키나와에서 3박 4일 있으면서 오키나와와 한반도의 군사기지 상황을 공유하는 세미나를 하고 나머지 시간은 바다 보면서 다녔어요. 국가보안법 전시 준비하면서 독일도 다녀오게 됐고, 민변 총회를 1년에 한 번 하는데 그때마다 부여, 전주 이런 데도 가게 되고요.

힘들었던 때도 있겠죠?

올해 4월 한승헌 변호사님이 돌아가셨어요. 저는 신년하례회 때 두 번 뵌 게 전부지만 말씀도 엄청 유머러스하게 하시고 사무처 일로 전화 드리면 격의 없이 편하게 받아주는 분이었어요. “뭐라고요? 이 할아버지가 귀가 잘 안 들려요. 다시 한번 말해주세요.”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분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됐던 때라 민주장으로 하게 됐는데 모인 단위들 중에 실무를 할 수 있는 곳이 민변밖에 없었어요. 마침 민변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적던 때라 한줌도 안 되는 실무자들이 그 일을 다해야 했어요. 장례 준비는 빠른 시간 안에 정확하게 해야 하고 여기저기 소통도 많이 해야 하고 챙길 게 너무 많아요. 처음 해보는 일이라 많이 힘들고 스트레스가 좀 컸어요. 그걸 민변 안에서 풀기도 어려웠고요. 장례가 끝나고 나서야 한승헌 변호사님 삶을 돌아볼 시간을 가질 수 있었어요. 당시 변호사라고 하면 사회적 지위도 있고 편하게 살 수도 있었잖아요. 시국사건이 발생하면 억울한 사람 한 명도 있어선 안 된다고 나서시고 본인도 감옥 갈 정도로 옳은 일에 발벗고 나선 분이잖아요.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사셨을까, 장례를 하는 동안은 오타 찾고 자료 정리하고 실무적인 일들만 하다가 애도할 시간을 놓쳐버렸죠.

나를 소개하는 키워드 세 개를 꼽아본다면?

현재에 충실한, 원칙 없는 원칙주의자, 인복. 쥐어짜서 꼽아봤어요. 저는 감정이 오래 가지 않아요. 막 화나는 일이 있어도 며칠 후면 잊어버리고 즐겁다고 꽂힌 일이 있어도 몇 주 지나면 시시해지거든요. 그래서 ‘냄비’라는 단어도 떠올려봤는데 좋은 느낌이 아니라서 ‘현재에 충실한’이라고 해봤어요. 그리고 저는 원칙주의자라는 말을 많이 들어요. 사람들한테 잔소리를 많이 하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부담을 느끼기도 해요. 각자 잘 할 수 있는 게 다르고 모두 같은 룰을 따를 수 없다는 건 저도 잘 아는데, ‘왜 저 사람은 회의록을 늦게 올리지?’ ‘왜 저 사람은 하기로 한 걸 안 하지?’ 이런 게 궁금하고 물어보게 돼요. 그런데 저도 어기는 순간이 많으니까 사실 원칙은 없는 거죠. 그래서 원칙 없는 원칙주의자? 약속한 건 해야 한다는 생각이니 약속주의자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세 번째는, 제가 인복이 많은 것 같아요. 민변도 지인 소개로 들어왔는데 와서 보니 좋은 분들 많이 만나고, 사람에 대한 고민도 나누면서 무던하게 지내고 있어요. 재물, 권력, 이런 건 없어도 사람 복은 많은 것 같아요.

어렵고 힘들 때도 있는데 활동을 계속 하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요?

거창한 질문 같아요.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에요. 다른 대안이 없다고 할까요? 사회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에 있다 보니 제 생각의 많은 부분을 이미 그런 바람이 차지해버렸어요. 여길 떠나서 뭘 할 수 있을까 떠오르지 않아요. 일반 회사를 가면 지금처럼 좋은 사람들 못 만날 것도 같고요. 서로 불편하게 만드는 질문도 많잖아요. 남자친구 있어요? 여자친구 있어요? 외모에 대한 얘기를 인사처럼 하고. 최소한 이런 불편한 언어들은 활동하는 분들 만날 때는 줄어드니까. 회사 다니면서 이런 상황들 직면할 때마다 스트레스 받을 테고, 사측의 이익을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하면 회의감도 들 것 같고요. 조금 다르게 활동하더라도 세상을 바꾸는 범위에 있는 일을 계속하고 싶어요. 개인 활동가로 살아볼까 고민도 잠깐 했는데, 제가 원칙 없는 원칙주의자, 엄청 게으르거든요. 혼자 일하면 나 혼자 약속을 만들고 나와의 약속을 지키고, 이렇게 못할 것 같더라고요. 출퇴근 시간이라도 정해져 있으니 규칙적으로 생활하게 되고, 사람답게 살려면, 지금이 제일 낫다.

안식월을 맞아 튀르키예를 다녀왔는데 여행을 즐기는 편인가요?

여행 좋아하죠. 문밖을 나서는 게 어렵지 나서면 돌아다니는 건 잘해요. 3년에 한 달 안식월이 나오는데 뭘 할까 고민했죠. 서울을 떠나고 싶어 강릉 한달살이를 알아봤어요. 방값이 80만 원이나 하더라고요. 해외여행 풀리기 전이라 비쌌어요. 면허가 없으니 구석구석 돌아다니는 묘미도 없고. 자가격리 기간 있어도 해외는 어떨까 생각하고 찾아봤죠. 조금만 보태면 태국에서도 보낼 수 있겠더라고요. 대중교통으로도 어딜 가든 새롭고 재밌을 테고. 조금 더 보태면? 조금 더 보태면? 그러다가 튀르키예를 갔어요. 안식월 시작하자마자 떠나서 출근하기 전전날 돌아왔어요.

소개하고 싶은 곳이 있나요?

패러글라이딩이 너무 재밌었어요. 페티예 지역에 욜루데니즈 해변이 있어요. 해발 1900미터에 달하는 산이 있고 그 앞이 해변이죠. 차로 30분 정도 올라가서 날아서 해변으로 내려와요. 공중에 떠서 구경하다가 천천히 내려오는데 그때 본 뷰를 잊을 수가 없어요. ‘사랑의 불시착’에서 손예진이 패러글라이딩 하다가 북한 넘어가잖아요. 그땐 이해가 안됐거든요. 무섭지도 않나? 왜 저기서 혼자 패러글라이딩 하고 있어? 해보니까, 내가 새가 된 느낌, 어디로든 갈 수 있겠다는 희열을 주는 운동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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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3대 패러글라이딩 명소로 꼽히는 욜루데니즈 해변으로 날다.

다른 나라에서 지내보니 다르게 보이는 게 있었나요?

해외 나가면 동양인이라고 무시당할까 긴장하게 되잖아요. 무시만 해봐라, 저도 벼르면서 갔어요. 튀르키예 남성이 동양인 여성에게 플러팅을 많이 한다는 얘기도 들었고요. 그래서 패러글라이딩 할 때 파일럿 분을 좀 오해했어요. 공중에서 사진을 찍어주는데 손을 흔들면서 혀를 내밀라는 거예요. 대충 하니까 더 흔들고 혀도 더 내밀라는 거예요. 이거 혹시 희롱 아닐까 의심하면서도 내 목숨이 달려있으니 시키는 대로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익스트림 스포츠 인증샷의 일반적인 표현이더라고요. 튀르키예가 무슬림 국가다 보니 여성 억압 같은 이미지도 있잖아요. 그런데 정말 다양한 사람들 만나면서 따뜻함을 느끼다 왔어요. ‘아마시아’라는 작은 마을에 갈 때였어요. 마을이 버스터미널에서 꽤 떨어져 있는데 저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버스에 앉아있었죠. 어떤 분이 어디 가는지 묻더니 터미널에서 너무 멀 거라면서 중간에 내릴 수 있게 버스 차장한테 말해주시더라고요. 바디랭귀지와 음성번역기를 이용해서 대화하는 저희를 지켜보던 할머니가 뻥튀기를 나눠주시기도 하고.

진선 님이 보는 인권운동사랑방은 어떤 단체인가요?

어떤 단체라고 정의 내리기 힘든데, 따뜻한 곳. 이름 그대로 사랑방. 열려 있고, 언제 가도 반겨주는, 다들 바빠 보이는데 그래도 안녕하세요 하며 웃어주는 곳. 인권운동더하기 운영위원 하면서 사랑방 활동가들과 처음 이야기 나눠봤어요. 어쓰랑 대용 님. 저는 그런 회의가 처음이었어요. 모두가 한 마디 이상씩 하고, 답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 자기 생각을 충분히 풀어내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심리상담 같은 느낌이었어요. 얼마 뒤 알게 됐는데 사랑방 월요일 회의가 그렇다면서요? 어떤 날은 저녁 지나서도 한다고. (미류 : 월요일 회의가 길어지는 게 따뜻해서만은 아니에요 ^^;;)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활동이 있나요?

기후위기 관련 활동에 관심이 가요. 환경운동으로 접근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인권운동으로 접근하는 것도 중요한데 어려운 것 같아요. 사랑방에서 어떻게 풀어낼지 많이 궁금해요. 기후위기가 무거운 주제인데, 개인들이 일회용품 덜 쓰고 채식하는 걸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거 말고 할 수 있는 게 뭘까? 그 답이 아직 없는데 사랑방에서 함께 찾아갈 수 있을 거 같아요.

사랑방에 더하면 좋을 것과 빼면 좋을 것 하나씩 꼽아본다면?

더할 것은, 굳이 떠올리자면 장판. 제가 양말 신고 그냥 들어가려니까, 안 된다고, 슬리퍼 신어야 한다고, 양말 더러워진다고, 바닥이 지저분하다면서 엄청 말리더라고요. 장판을 깔면 되지 않나? 두세 번 겪어서 너무 인상적이라 장판이 떠올랐어요.
뺄 것도 없는데, 글쓰기? 사랑방 활동가들은 늘 마감에 쫓기더라고요. 만날 때마다 마감 얘기 주고받고, 인권운동더하기 회의가 좀 늦게 끝날 때도 있는데 그때까지 사무실 남아있는 분들도 있고. 근데 뺄 건 진짜 없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