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고 성실했던 한 여성이 아내구타의 누습을 당연시하는 가부장제 사회의 희생물로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죄없이 착하게 살면서도 14년간 포악한 남편에게 온갖 매질을 당했던 여성, 오직 자녀를 위해 참고 살아온 한 여성이 자신을 찌르는 남편의 칼을 피하는 사투 속에서 살아남은 죄가 살인이란 것입니다.
이형자 씨는 1993년 2월 21일 저녁 8시부터 22일 새벽 2시까지 두달만에 만취하여 귀가한 남편 앞에 무릎 꿇려져 구타와 수모를 당하다가 칼을 들고 찌르려는 남편을 막는 과정에서 살인자가 되어버린 두 자녀의 어머니입니다.
그는 중고등학교를 장학생으로 다녔으며,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그 돈으로 야간대학을 졸업한 성실한 여성입니다. 교사가 되어서도 남달리 성실했던 이 여성은 자신이 버는 돈을 모두 남편에게 빼앗겨서 어떤 경제권도 갖지 못했고, 14년간이나 이혼도 해주지 않으면서 자신과 친정에 폭력을 휘둘려온 남편을 그저 용서하고 인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아무리 성실하고 인내심이 강해도 그를 둘러싼 가부장제 사회의 아내구타 폐습은 그를 14년의 구타 속에 살게 했습니다. 또 그 모든 것을 가족내 문제로 치부하고 방관하는 현행법은 자신을 본능적으로 방어하던 그를 살인자로 만들어 감옥에 가두어버린 것입니다.
처음에 법정은 그가 고의적 살인을 했다며 무기형을 구형했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이라 6월 25일 1심 공판에서 5년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나 5년이 무엇입니까. 그가 매맞고 피눈물을 흘리며 생명을 위협받을 때 눈 감았던 법은 이제라도 그녀의 정황을 살펴 위무와 보상은 못해줄망정 그녀를 무죄 석방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생명을 위협하는 사투 속에 놓여져야 했고, 꿈에도 원한 적이 없는 살인자가 되도록 만들어 선량한 여성에게서 아이들과 직장과 명예를 빼앗아버린 가정폭력의 책임은 과연 누가 져야 하는 것입니까.
이형자 씨는 당연히 무죄석방 되어야 하고 그토록 성실히 노력해서 얻은 직장에 복직되어야 마땅합니다. 우리 공대위는 그녀의 무죄를 확신하며 무죄석방을 요구합니다. 이형자 씨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하루 속히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 사회는 그간 방관과 무관심으로 일어난 수많은 인권침해나 이형자 씨를 불행으로 빠뜨린 혐의를 벗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내 구타를 비롯한 가정폭력 범죄가 법으로 처벌되는 법의 제정도 필요합니다. 매맞는 사람들의 긴급피난처도 마련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때리는 것과 맞는 것이 묵인되는 사회의 의식개조가 시급합니다.
우리는 이 사건의 판결결과가 매맞는 아내의 인권보호를 위한 시금석이 되어줄 것을 믿으며 정의와 진실의 이름으로 재판부와 우리 사회에 이형자 씨의 무죄석방을 결연히 요구하는 바입니다.
1993년 11월 4일
이형자 씨 무죄석방 공동대책위원회
공동대표 : 정각, 김용환, 김수옥, 박정향
참가단체 : 부산여성회, 부산여성노동자회, 여성정책연구소, 부산불교인권위원회, 부산여성의전화 등 18개 단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