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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인권시평> 월드컵, 누구를 위한 잔치인가


14일 새벽 열린 프랑스 월드컵 한국과 멕시코의 경기를 보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한국이 멕시코를 눌러주기를 바랬다. 2대1 정도의 스코어, 아니면 그보다 더 많은 점수차로 이겨주길 바랬다. 객관적인 전력으로 볼 때 분명 한국보다 멕시코가 우위에 있기 때문에 멕시코가 2대1 정도로 이길 것이라고 나름대로 예측하고 있었음에도 진정 한국이 이번만은 멕시코를 이겨주길 바랬다.

그러나, 한편으론 걱정을 떨칠 수 없었다. 세계가 월드컵 축구에 열광해 있는 동안 인류의 중요한 문제들이 뉴스에서 사라지고, 특히나 독재국가의 정부들은 이 기회를 활용해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멕시코에서는 지난 10일 남부 치아빠스 3개 공동체의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EZLN)에 대한 소탕작전을 벌여 8명의 주민을 살해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체포·고문했다. 이런 폭압적 작전에 대해 메리 로빈슨 유엔인권고등판무관도 멕시코 정부를 비난했다.

멕시코의 사빠띠스따는 94년 1월 1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출범에 맞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그후 멕시코 정부의 몇 차례의 진압 작전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영향력을 확대해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꼽히고 있다. 그들은 치아빠스 정글을 무대로 자신들의 토지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고, 자신들의 이념과 행동들을 인터넷을 통해 세계에 알려나가고 있어 21세기형 혁명의 한 모델로 불려지기도 한다. 그들은 자본주의적 개발을 거부하고, 자신과 그들의 역사, 문화가 관광객들의 상품으로 전락하는 데 적극 반대한다. 그들은 정글로 세계 수천 명의 활동가들을 결집시켰고, 멕시코내 민주적 활동가들을 소집하기도 했다.

그러나, 멕시코 대표팀이 한국을 3대1로 격파하자 멕시코의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멕시코를 연호하며 한바탕 '광란의 축제'의 축제를 벌였다고 한다. 멕시코 대표팀의 승리는 결국 정부의 사빠띠스따 탄압을 외면하게 만들었다.


월드컵에 가려지는 인권유린

월드컵이 진행되는 32일간 하루 평균 10억명 이상이 시청할 것이고, 총 370억명이 월드컵에 정신을 팔 것이라는 예측은 최소한 이 기간동안 인류의 지대한 관심사들은 월드컵의 열풍에 가려지고도 남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적극적으로 각 나라의 정부와 거대기업들은 자신들에 비판을 약화시키는 수단으로 월드컵을 활용하지 않겠는가. 둥근 축구공 하나에 인류
가 넋을 빼앗기고 있는 셈이다.

16강에 재도전하는 한국의 경우 멕시코와 첫 대결을 벌인 14일 새벽 시청률이 79%로 스포츠사상 최고였다고 하니, 가히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이 그 새벽 불을 밝히고, 잠들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어디서고 그런 놀라운 시청률 때문에 경제가 망한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일본 엔화의 폭락에 의한 제2 환란의 위기에 대한 경고도 먹히지 않는다. 월드컵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다. 현실이 답답하기 때문에 더더욱 월드컵에 연연하는지 모르지만, 월드컵 16강이 지금의 우리 문제들을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이제 난 진심으로 우리나라 대표팀이 16강에서 탈락하길 바란다. 월드컵이 끝난 뒤에도 16강 신화를 이뤘다고 얼마나 미쳐 돌아갈 것이며, 그 호들갑 속에서 오늘도 죽음과 삶의 기로에 선 많은 이들의 갈등이 더 오랫동안 외면당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공안당국은 새 정부 출범 이후 학생과 노동자들을 국가보안법과 집시법 등으로 160명 이상 연행했다. 이는 새 정부 초기에서는 볼 수 없던 현상이다. 공안세력은 휴지기도 없이 경제위기라는 국가적인 위기를 틈타 오히려 자신들의 기득권을 확고히 뿌리내리려는 탄압의 고삐를 바짝 당기고 있다. 집회 때마다 접하는 불법 검문도, 생존권을 요구하는 도원동 철거민들의 농성도, 한달 넘게 서울역에서 노숙하는 삼미특수강 노동자들도, 일용직 노동자들의 명동성당 농성도, IMF 자살자들의 문제도 더 이상 축구공 하나에 가려져서는 안된다.


한국 16강 탈락을 기원한다.

수천만, 수억 달러를 몸값으로 받으며 뛰는 슈퍼스타들의 발재간과 인류를 지배하는 거대기업들의 돈잔치인 월드컵은 인류의 희망을 만들 수 없다. 월드컵에서 누가 스타로 부각되든, 호나우도가 몇 골을 넣든지 브라질을 누르고 누가 피파컵을 거머쥐든 세계 민중들은 월드컵으로 엄청난 이득을 챙긴 거대기업들의 노예로 전락하고 있다. 오히려 월드컵을 통해 그들의 입지만이 강화될 것이고, 따라서 멕시코의 사빠띠스따와 나이지리아의 오고니족들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만 더욱 어렵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투쟁과 호소가 비극에 빠진 인류의 몇 안 될 지도 모르는 희망일 텐데도 말이다.

난 오늘 한국이 16강에서 탈락하고, 멕시코와 나이지리아 같은 인권유린 국가가 철저하게 패배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박래군(인권운동사랑방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