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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논평> 유엔체제의 종말과 새로운 정글 질서의 도래


미국이 기어이 참혹한 대량 학살전을 시작했다. 이미 미군의 공격으로 수십 명의 민간인 피해자들이 생겨나고 있으며, 피해자의 수는 눈덩이처럼 더욱 불어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추악한 전쟁의 불구덩이 속에 놓인 이라크 민중의 현실을 '충격과 공포' 속에서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앞에는 미국에 의해 헌신짝처럼 내던져진 유엔과 국제법이 초라한 몰골로 놓여있다. 이라크전은 '유엔헌장' 위반이라는 목소리들도 초라하게 들린다. 국제법상 개전 요건을 완전히 무시한 채 일방적 '침략'을 개시한 미국의 행동은 2차대전 이후 자신의 주도로 건설된 유엔과 국제법으로부터 '더 이상 구속받지 않을 것'임을, 또 약육강식의 새로운 정글 질서가 기존의 세계질서를 대체할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이미 전부터 감지되어 왔다. 2차대전 이후 형식적으로나마 유엔과 국제법을 존중해왔던 미국은 최근 도쿄기후협약을 탈퇴했으며,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의 처벌을 위한 국제형사재판소의 출범 이후에는 개별 국가들을 협박해 '미군 불처벌 협정'을 체결하는 등 국제법 위에 군림하려는 고압적 행보를 보여왔다. 그리고 이제 이라크전을 통해 미국은 유엔과 국제법의 죽음을 공식 선포하며 '침략과 학살의 무법지대'를 건설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유엔이라는 기구의 죽음에 대해서가 아니다. 유엔을 통해 그나마 발전해왔던 국제인권법이 곧 쓰레기 소각장으로 보내질 종이조각이 됨으로써, 한 제국의 횡포를 제어할 어떠한 제도나 규범도 존재하지 않게 된 현실, 그리고 그것이 낳을 죽음과 폭력의 악순환을 슬퍼하는 것이다. 1차대전 이후 건설된 국제연맹체제는 독일과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에 의해 무너졌고, 그것은 다시 2차대전이라는 파멸적 결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제 2차대전 이후 건설된 유엔체제는 미국에 의해 무너져 더 큰 파국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오늘은 이라크지만, 내일은 또 어떤 나라가 불벼락을 맞을지 모른다. 이번 전쟁은 전세계를 향한 대량학살전의 전초전일 뿐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지금 미국의 침략전쟁을 하루빨리 종식시켜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는 사멸해가는 유엔과 국제법의 권위를 복원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진정한 민중들의 평화와 인권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질서의 밑그림을 그리는 일까지를 내다보아야 한다. 수업을 중단하고 거리로 달려나온 청소년들, 이라크 어린이의 아픔을 내 것으로 여기는 어린이들, 전쟁 개시에 항의해 파업에 돌입한 노동자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새로운 미래의 싹을 본다. 이미 싸움은 미국이라는 깡패 제국과 인권과 평화를 위해 이라크 민중과 기꺼이 연대하려는 전 세계 민중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