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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이산가족 상봉 소식을 접하며

오래된 카세트 테이프가 하나 있다. 주파수를 타고 흘렀던 한 라디오 프로그램이 녹음된 그 테이프에는 해방 전 중국에서 헤어져 소식이 끊긴 동생을 애타게 찾았던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2월 20일부터 25일까지 열린 이산가족 상봉 소식에 테이프 속 낡고 오래되어 지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흘러나왔던 할아버지의 달뜬 목소리가 떠올랐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라디오로 전파되어 운 좋게 닿았고, 그렇게 할아버지는 동생의 죽음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몇 년 후 한중수교가 되고 나서야 동생의 가족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저마다의 사연을 품었을 이산가족들, 오랜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담은 주름진 얼굴들을 서로 마주하며 복받쳤을 마음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이루어진 1차 이산가족 상봉 이후 이번에 진행된 19차 상봉, 김대중-노무현 정부로 넘어오면서 연 3회 꼴로 조금씩 활발히 이루어지던 상봉은 이명박 정부 들어 단 2차례밖에 열리지 않았다. 이번 상봉은 2010년 10월 이후 3년 4개월 만에 재개되었다는 면에서, 그리고 박근혜 정부 들어 첫 상봉이란 점에서 주목되었다. 또한 외교와 안보분야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 있는 박근혜 정부에서 이산가족 상봉 재개로 이명박 정부 이후 악화된 남북긴장관계를 완화할 물고를 틔었다고 평가받았다.

오랜 시간 애타게 기다려온 이산가족들에게 더욱 감격스러웠을 이번 상봉 재개는 물론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남북관계가 악화되게끔 물꼬를 틀어막았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 남북교류가 확대되고 이산가족 상봉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추진해온 정책들은, 보수정권이 들어서고 군사적 긴장관계를 초래하면서 가로막혔다.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 하에서 냉각된 북과의 관계를 개선함으로서 이명박 정부와 선을 긋는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산가족 상봉은 남북관계가 변화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강렬한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비춰졌을 것이다.

눈물바다가 된 이번 상봉 소식을 전하며 더 적극적으로 상봉을 추진해야 한다고 한다. 1985년 적십자사의 추진으로 분단 후 최초로 이루어진 이산가족 상봉, 이후 뚝 끊겼다가 2000년부터 정부 주관 행사로 지금껏 진행되며 그토록 기다려온 만남이 성사된 사람은 2만 5천 명에 불과하다. 13만 명에 이르는 이산가족 등록자 중 절반 가까이가 사망하고, 7만 여명이 남아있지만 대부분이 70세 이상의 고령자이기에 상봉 추진이 보다 긴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구체적 방안으로 상봉 시기를 정례화하고 상봉 인원을 대폭 늘리자는 제안도 있다. 이러한 제안이 현실로 이어져 남과 북의 긴장상태가 더 지속, 악화되지 않길 바라지만 박근혜 정부의 행보를 보면 걱정이 앞선다. 


이번 상봉에서 이산가족들이 오랜 세월 버티고 기다려 감격스런 재회를 하던 시간, 다른 한편에서는 군사훈련이 있었다. 이산가족이라는 비극이 전쟁에서 비롯했건만, 박근혜 정부는 언제든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진행되는 훈련을 강행했다. 군사훈련 기간에 상봉 행사를 진행할 수 없으니 미룰 것을 요구하는 북에 예정대로 훈련할 것이라며 한 치의 양보도 불가하다는 입장만을 고수했다. 이번 상봉은 몇 번의 무산 위기 끝에 북이 입장을 선회하면서 어렵게 성사되었다. 타협 없음을 장점마냥 이야기하지만, 모든 것을 꽉 틀어막고 있는 불통 정부 하에서 앞으로 남북관계 또한 불통으로 치달을까 우려스럽다.

그동안 이산가족 상봉은 남북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긴장과 갈등 상황이 있을 때마다 굳게 닫혀버리는 문이었다. 문고리를 쥐고 있는 정부를 통해서만 간신히 드나들 수 있는 좁은 문이라는 상황이 달라져야 한다. 북에 이산가족 상봉을 순수한 인도적 차원으로만 접근할 것은 강조한 박근혜 정부, 그렇다면 지금처럼 정부 주관으로 협소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다 다양한 매개로 자유롭게 만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여러 과제가 제기된 이번 상봉이 이후 남북관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이어질까 주목된다. 잊혀져온 전쟁이라는 비극의 구체적 얼굴을 다시금 마주하면서 적대 구도와 긴장 관계를 흔들 힘이 우리 안에서 조금 더 자랐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