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 문제에 대해 한국의 시민단체에선 어떻게 대응하고 있죠?” ‘대구라운드 세계대회’(10월 6~8일, 대구 경북대 대구은행 연수원)에 참석한 네덜란드의 환경단체이자 국제통화기금-세계은행 조사․감시 단체인 ‘보스 엔즈’(Both Ends)의 비에트 비에트시마 사무총장은 ‘노근리 학살 사건’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한국사람들에게 질문을 한 게 아니었다. 정작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노근리 학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을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이 문제와 관련해 스페인의 피노체트 제소 사례가 참고가 될 것이라고도 했다.
미국을 전범으로 제소한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노근리 학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것은 20세기를 바르게 결산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미국은 무수히 많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단 한번도 심판받지 않았다”
말인즉슨 맞는 말이다. 적잖은 전범 재판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미국은 고발자의 위치에 있었지, 피고였던 적이 없다. 노근리 학살과 유사한 베트남전 당시 ‘밀라이 학살’ 때도 미국은 윌리엄 캘리 중위 단 한 명만을 법정에 세웠을 뿐이다. 그나마도 닉슨 당시 대통령의 개인적인 지시에 따라 사흘만에 풀려났다.
미국의 잘못을 묻지않고 20세기를 결산할 수는 없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미국, 망연자실 바라만 보는 제3세계의 민중들. 새로운 밀레니엄을 이야기하기보다 ‘야만의 시대’였던 20세기를 제대로 마무리하는 게, 어쩌면 더욱 중요한 미래준비인지도 모르겠다. 유일 초강대국 미국의 잘못을 묻지 않고, 야만의 시대를 결산할 수는 없는 법이다. 더군다나 지금 미국은 신자유주의라는 또 다른 야만의 구렁텅이에 전세계 민중들을 몰아넣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시민․사회단체들이 비에트 사무총장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했으면 한다. 우리의 아픈 역사를 깔끔하게 마무리하기 위해서도 우리가 주체가 되어 국제 연대를 이뤄내는 게 필요하겠다. 이는 단순히 우리가 피해자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비에트의 말을 더 들어보자.
“난 스페인의 피노체트 제소에 대해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스페인 사람들의 이중성 때문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피노체트 치하의 칠레에서 자국민이 살해당한 것에 분노하고 있지만, 자국 내에서 벌어진 프랑코 독재 치하의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멀리 네덜란드에서 찾아온 이 손님은 우리에게 민주주의를 정말로 사랑하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알려준 듯하다. 이중잣대를 들이밀지 않는 태도는 언제나 중요하다.
- 1477호
- 이제훈
- 1999-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