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를 보잘 것 없게 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세상을 보는 나름의 눈, 즉 세계관을 가진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는 점일 게다. 대개의 우리에게 삶이란 나와 세상 사이의 대화와 긴장이 아니라 일렬로 행진하는 개미들의 삶과 같아 보인다. 물론 그런 우리의 모습은 지난 50년 동안 우리에게 강요된 극단적인 형태의 극우반공주의 체제와 관련한 것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의 3대에 해당하는 그 세월 동안 우리에게 극우반공주의 외의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일은 곧 국가보안법이라는 중세적 처형도구에 머리통을 집어넣는 일과 같았다.
아들에게 무슨 이유로든 해라 마라 하는 일이 없던 내 부모도 초등학생인 내게 늘 이르곤 했다. "얘야, 정치 얘기하면 안 된다. 잡혀간다." 국가에 대해 이견을 갖는 일은 철없는 초등학생에게조차 위험한 일이었다.
이제 우리는 공화정의 외피를 이루었다. 우리는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혹은 복덕방에 모여 앉아 얼마간 국가를 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국가가 요구하는 세계관에 대해 약간의 이견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남겨진 여전한 현실들은 그런 변화가 진정한 것인지를 의심케 한다.
학술 영역에서 공론화된 저작물을 출판한 일로 출판사의 대표가 구속되거나 일군의 양심적인 사람들이 난데없이 체포되어 수사과정에서야 자신이 '이적단체'를 만들고 활동했음을 비로소 알게 되는 황당한 일들은 과거의 얘기가 아니다. 세상을 보는 여러 방법 가운데 왼쪽편을 선택하는 일은 여전히 불편하다. '진보' 혹은 '진보주의자'라는 말은 그 원래 의미와는 별도로 '사회주의'나 '사회주의자'라는 말을 무난하게 표현하는 용도로 사용되곤 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정치적 권리의 한계선을 넘나들며 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런 적극적인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였다. 그렇게 정치적 한계선을 넘나들며 감시당하고 투옥되는 소수의 사람들이 그런 한계선에 훨씬 못 미친 지점에서 행진하는 개미의 삶을 살아가는 대개의 사람들의 권리를 확보하는 게 사실이지만 말이다.
과거의 우리 사회가 자의든 타의든 극우반공주의에 적극적인 사람들로 넘쳐나는 사회였다면 오늘 우리 사회는 군부파시즘이라는 폭력적인 방식 대신 언론이나 문화 같은 보다 세련된 방식을 선택한 극우반공주의 세력의 준동에 무덤덤한 사람들로 채워진 사회다.
어떤 세계관도 갖지 않는 일이 가치중립적이라는 생각은 순진하지만 어리석다. 행진하는 개미는 그 일사불란함 속에서 늘 안도하지만 자신이 어떤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들지 자신도 알 수 없는 위험천만한 상태에 놓여 있다.
김규항 (아웃사이더 주간)
- 1596호
- 김규항
- 2000-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