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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인권시평> 길을 빼앗긴 서울


지금 막 시골에서 서울로 돌아와 이 글을 쓴다. 새벽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니 출근길로 차들이 모두 거북이 걸음이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뿌연 연무, 온통 회색의 서울. 싱그러운 5월의 아침은 아무 데도 찾을 길이 없다. 길, 어디를 가도 길이 막힌다. 아니, 서울에 길이 있던가? '도시는 길'이라는 말이 있지만 서울에 길이 있을까?

시골 태생이 서울에 처음 왔을 때 도시는 먼저 건물과 길로 다가왔다. 도로에 서면 건물이 전망을 가로막고 차를 타면 길은 시야에서 너무 빨리 사라졌다. 걸음걸이의 속도로 발 밑에 밟히던 시골길과 달리 도시의 길은 내 몸과는 무관하게 왔다가 사라져 버리곤 했다.

이런 점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자동차가 일상이 될 수밖에 없는 도시에서 길은 자기 취소의 공간이라는 사실. 자동차를 타면 길은 앞에서 급하게 다가서며 사라지는, 가능한 한 빨리 자기를 취소해버리는 공간이라는 사실. 정체 때문에 자동차가 멈춰서면 길은 원래 있던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내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빨리 지워 없애야 하는 지면으로만 볼 뿐이라는 사실.

하긴 도시에도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도시의 특징이 도로가 많다는 것 아닌가. 그러나 길이 많다고 걸을 길이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한국은 사람이 다닐 길을 체계적으로 지워버린 사회이니까. 서울이 가장 심한 편이지만 대부분의 도시에서 산책은 불가능하다. 가로수가 우거진 한적한 거리도 욕심내서는 안 된다. 거리를 걸으며 마음에 맞는 사람과 낮은 목소리로 담소를 즐기는 것? 엄두가 나지 않는다. 길 건너편의 아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 아예 생각을 말자.

한국의 도시에서 길은 그저 빨리 지워야 없애야 할 공간으로 존재한다. 길은 통과해야 할 대상일 뿐 지체하며 멈출 곳이 아니다. 수많은 길이 있지만 길마당은 어디에도 없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그래서 길을 잃어버린 셈인데, 길 없이 어떻게 사람다운 삶을 산다고 할까.

길은 신체를 가진 동물에게는 절대적이다. 우리 각자는 수십 킬로그램의 무게가 나가는 몸으로 돌아다닌다. 길을 빼앗겼다는 것은 이 몸을 둘 곳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차도는 자동차에 뺏기고, 건널목이 육교나 지하도로 바뀐 도시에서 우리는 몸 둘 바를 모른다. '보행권'이라는 것? 이런 상황에서 말도 못 꺼낼 것 같다.

잠깐 떠났다 돌아온 서울, 내 몸을 짐짝처럼 굴리고 다녀야 할, 길도 없는 이 서울. 징그럽다.

강내희 (중앙대 영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