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가 '전쟁 반대' 의견서를 내놓자,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들과 야당들은 인권위가 본분을 망각한 채 국론분열을 선동하고 있다며 맹공을 가했다. 특히 한나라당은 위원장의 사퇴까지 요구했다. 정부와 여당도 인권위의 의견 발표가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자 이와 같은 공세 때문인지 인권위원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의견서를 폄하하는 발언들을 잇따라 내놓았다. 한 상임위원은 라디오 인터뷰 중에 개인의 의견임을 전제하면서 "공병과 의무병의 파병에는 찬성한다"며 '전쟁반대'라는 위원회의 입장과는 상반되는 입장을 제시해 진행자로부터 빈축을 샀다. 인권위 직원들 중에도 이런 위원들의 무소신 발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 직원은 "말이나 하지 말든지 스스로 인권위 위상에 먹칠을 하는 위원들 때문에 분통이 터진다"고까지 했다. 인권위원들 중 유일하게 위원장만이 정치권이나 언론의 비판에 개의치 않는다며 일축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한편, '전쟁 반대' 의견서가 발표되자 지금까지 인권위를 비판하던 분위기였던 인권위 홈페이지에는 인권위를 지지한다는 의견이 많이 올라왔고, 심지어는 "인권위원들을 존경한다"는 글까지 올라왔다. 지금까지 인권위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던 19개 인권단체들도 이 사안에 대해서는 "오히려 인권위가 현재의 불법적이고 반인권적인 전쟁에 침묵하는 것이야말로 인권옹호기관으로서의 책임을 망각하는 것"이라며 인권위의 입장에 대한 분명한 지지를 밝히는 성명을 이례적으로 발표했다. 또한, 위원회의 공식적인 의견서가 발표되기 이전 홈페이지에 전쟁·파병 반대 성명서를 게시했던 직원들도 자신들의 성명서를 위원회 의견서로 대체하기로 결정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이러한 지지가 무색할 정도로 위원들의 무소신 발언들이 이어진 것이다.
결국 '인권위가 마땅히 할 일을 했고 할 말을 했다'는 모처럼의 지지와 옹호는 인권위의 위상도 제대로 모르는 정치권과 보수언론의 딴죽걸기에 겁먹은 인권위원들의 무소신 행보에 의해 빛이 바랬다. 앞으로 인권위가 정치권의 눈치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인권의 원칙을 뚝심 있게 밀고 나가면서 자신의 위상을 바로 세울 수 있을는지 심히 걱정스런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