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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문헌읽기] “자유를 찾아” 자유승차단의 증언 (1961년)

‘희망의 버스’는 50년을 넘어 달린다

지난 6월 11일, 멋진 차가 출시됐다. 그 이름이 ‘희망의 버스’다. ‘희망의 버스’는 부산을 향했다. 150일이 넘게 비바람 햇볕 뒤집어쓰며 35미터 높이 크레인 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 김진숙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 사람은 산재와 인간 이하의 노동조건에 맞서다가 20년 전에 일찌감치 잘린 노동자다. 그런 그 사람이 지금 잘린 동료들과 함께 삶을 지켜야 한다고 크레인 위에 올라갔다. 그 크레인은 몇 해 전 그 사람의 20년 지기가 대량해고에 맞서 농성하다 홀로 목을 맨 곳이다.

주말 식당 알바가 생계줄인 나는 희망버스를 타지 못했다. 종일 라디오를 들으며 일을 하는데, ‘행락객 차량 때문에 길이 무지 막힌다’, ‘막힌다고 불평하지 말고 여유 있게 운전하시라’는 디제이들의 판에 박힌 말이 계속됐다. 하지만 ‘희망의 버스’ 운행소식은 전해주지 않았다. 한밤중에야 돌아와 컴퓨터를 켜니 희망 버스의 수난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문을 걸어 잠근 용역과 경찰이 환대(?)한 가운데 희망 버스는 사다리를 타고 넘어 연대의 신바람 속에 시승식을 치렀다. 남의 잔치에 배 아픈지 당국과 사측은 사법처리라는 애프터서비스까지 준비하고 있는 듯하다.

‘희망의 버스’를 보며 미국 시민권 투쟁의 ‘자유승차단(freedom rides)’이 떠올랐다. 버스에서 백인과 유색인종의 좌석을 구분하는 차별에 맞서 ‘버스 안타기 운동’이 있었고, 흑인에겐 밥을 팔지 않는 백인전용식당에 가서 ‘앉아 버티는 운동’이 있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자유승차단’ 운동이었다. 인종차별분리정책에 반대하는 흑인과 백인들이 함께 버스를 타고 인종차별이 심각한 미국 남부 전역을 돌면서 교통수단에서의 인종분리 관행을 깨려는 시도였다. 인종분리 자체가 불법이었지만 그걸 당연시 여기는 사람들을 향해 행동으로 분리를 없애려 한 것이었다.

자유승차단원들은 가는 곳마다 몰매를 맞고 버스가 불에 타는 등의 폭력 세례를 받았다.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줄 의무가 있는 경찰은 오히려 자유승차단원들을 체포해 가두고 감옥에서 온갖 부당한 처우로 괴롭혔다. 한 감옥에서는 수감자들이 저항의 노래를 부르자 매트리스를 빼앗겠다고 위협했다. 그때 협박을 받은 수감자는 “당신이 나를 어떻게 다뤘는지 하나님께 이를 거야”라고 노래했다고 한다.

이 운동에 대해 기록한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인종분리차별에 항의하는 집회 후 대규모 체포가 이뤄진 뒤 경찰서장이 자신의 책상 앞에 늘어선 죄수들의 이름을 받아 적고 있었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아홉 살 가량의 흑인 남자아이가 서있었다. “이름이 뭐냐?”고 묻자 아이는 서장을 똑바로 쳐다보고는 “자유(Freedom), 자유요.”라고 답했다는 구절이다.

지금 대개의 한국 사람들은 먼 나라에서 벌어졌다는 인종분리와 차별을 어이없는 옛일로 여길 것이다. 하지만 우리 앞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는 ‘분리’와 ‘차별’에 대해서는 왜 어이없게 여기지 않을까? 같은 일을 하는데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분리되고 남녀가 분리되어 다른 취급을 받는다. 같이 이익을 내는 데 큰 기업은 다 먹어도 괜찮고 작은 기업과 노동자는 자기 몫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모두에게 중요한 사안인데 언론에서 누구 입은 대서특필하고 누구 입은 죽어도 사연을 다뤄주지 않는다. 살아 보겠다는 이웃을 찾아 돌보겠다는데 외부세력 혹은 불법침입자로 분류․처벌하면서 비싼 광고비 들여 아름다운 연대를 홍보한다. 그 분리와 차별의 논리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흑백이 구분되어 식당도 버스도 화장실도 학교도 분리․차별했던 관행과 다를 바가 없는 일들이다. 그런 분리와 차별에 저항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저항에 몽둥이 들고 나오는 것도 다를 바 없는 광경이다.

이런 지독한 분리와 차별을 깨기 위해 희망 버스가 출시된 것이다. 희망의 버스 탑승자들은 감옥에 갇힌 자유승차단원들이 교훈과 노래로 용기를 얻은 것처럼 김진숙의 외침을 담뿍 받아 나누었다. 김진숙의 외침은 간단하다.

“모여야 안 짤리고 모여야 안 죽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 모든 사람은 악당”
“한사람씩 나눠들면 가벼워지겠지요”
“내 걸 나눌 수 있을 때 진정한 연대는 가능하고 그래서 연대는 용기이다”
“용기야말로 얼마나 찬란한 자유인지, 뼈가 저리지요.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지지 않는 것, 그것만큼 소중한 게 또 있을까요.”(김진숙 트위터와 『소금꽃 나무』 중에서)

희망의 버스는 이제 출시됐고 주문이 쇄도할 것이고 승차권은 동이 날 것이다. 자유승차단의 영어는 freedom rides이고 이 단어를 조금만 고치면 무임승차자(free rider)가 된다. 무임승차자란 정의로운 공동의 이해를 위해 힘을 모으는데 끼지 않고 결실만 나누려는 사람을 지목하는 말이다. 무임승차자가 아니라 희망의 버스를 타는 우리는, 그렇게 분리와 차별에 저항하는 우리는 다시 또다시 만날 것이다.

“자유를 찾아”(In Pursuit of Freedom) (William Mahoney, 1961년)

5월 15일 월요일, 나는 하워드 대학교 학생들의 사진을 봤다. 그네들과 나는 지난 일년 반 동안 워싱턴의 비폭력행동집단에 참여했다. 사진에서 그 학생들은 앨라배마 주 애니스톤의 변두리에서 불타는 버스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사진 설명에선 그 학생이 버스를 내릴 때 머리를 맞았다고 했다. 나는 격분했다. (…)

어느 날 저녁 늦게, 비폭력행동집단의 일원인 폴과 존이 몽고메리로 떠나기 전에 작별인사를 하러 내 방에 들렀다. 폴과 존은 자유승차단에 결합했다. (…) 폴은 가능한 한 많이 몽고메리로 내려와 달라고 간청했다. (…) 자유승차단은 가장 힘든 형국이었고 남부의 형제들은 모을 수 있는 모든 사람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나는 가기로 결심했다. 나는 시간 당 60센트의 일을 그만둬야 했고 시험을 일찍 치르거나 돌아올 때까지 미뤄야 했다. (…)

부모님이 내 결정을 반대하리란 걸 알았다. 그래서 부모님께 설명하는 편지를 썼다. 편지는 앨라배마로 출발하면서 부쳤다. 모든 혁명은 가족과 그런 갈등을 일으켰다는 생각으로 나는 내 자신을 위안했다. (…) 몽고메리행 표를 들고 워싱턴에서 고속버스를 탔다.

(…) 하루 동안 버스를 타면서 친구 프랭크와 나는 인종문제를 토론했고 다른 승객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해외에서 막 돌아온 공군이 우리 앞자리에 앉아 세 명의 다른 백인에게 ‘자유승차단’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들의 합의는 인종차별철폐주의자들을 가장 가까운 나무에 목매달아야 한다는 거였다. (…) 한 순간 한 여성이 큰소리로 자신이 흑인으로서 겪는 어려움에 대해 말했다. 자기는 일자리에서 맨 마지막으로 고용되고 최악의 임금을 받으며 맨 처음에 해고된다고 말이다. 빈민굴에 살면서도 지불해야만 하는 임대료에 대해 불평했다. 앞자리에서 백인들은 그녀의 큰 불평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버스 승객들이 두 개의 다른 세계로 나눠져 있는 것 같았다. 각 세계의 거주자들은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

(…)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신속히 체포됐다. 우리가 백인 버스 정류장에서 꺼지라는 경찰의 명령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조사받는 동안 나는 수사관에게 물었다. 미국은 우리가 한 것처럼 행동할 권리를 우리가 가졌다고 전 세계에 공언한 법적․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있는 걸 아느냐고, 당신이 우리를 체포함으로써 세계가 미국에 대해 가졌을지 모를 존중심을 깨뜨렸다는 걸 아느냐고 물었다. 그 경찰관은 그럴지도 모르지만 남부는 존중받아야 할 특수한 전통을 가졌다고 말했다.

(…) 우리는 감옥으로 옮겨졌고 먼저 체포된 사람들과 함께 갇혔다. 나는 거기서 친구들을 만났다. (…) 30여명 이상인 우리들은 5개의 감방과 꼭대기에 있는 식당에 있었다. 밤에 우리는 커다란 면화 더미 위에서 잤고, 더럽고 좁고 유혈이 낭자하고 바퀴벌레가 점령한 감방에 갇혔다. 덥고 과밀한 속에서 날들이 갔다. 식당에서는 카드를 하고 읽고 (…) 노래를 했다. (…)

6월 24일(토요일), 교도관들은 ‘자유승차단’의 노래 소리가 너무 커서 그 벌로 매트리스를 가져가겠다고 결정했다. 처음엔 그걸 농담으로 알았고 그 일에 대한 노래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시멘트 바닥 또는 에어컨 시스템이 폭풍바람을 내는 강철 지붕 위에서 사흘을 자고 나자 침묵하게 되고 우울해졌다. 자유승차단원이 또 크게 노래를 부르자, 손목을 죄는 차코를 채워 6명을 끌고 가서는 가로 세로 6인치 캄캄한 상자 속에 이틀을 처박아뒀다. 용감한 동료들은 독방에 처박히면서 노래했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다뤘는지 하나님께 이를 거야.”

동료 수인 중에서 짐 파머가 우리가 받은 처우에 대해 관리자에게 항의하러 갔다가 협력하지 않으면 조건이 더 악화될 거란 말을 들었다. 협력이 뭘 의미하는지 정의하는 규칙을 서면으로 만들자는 요청이 있었지만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결국, 갇힌 사람들은 자신들 스스로의 최소 기준을 규범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자신들이 당국을 존중할 의무가 있다 할지라도, 당국은 그들을 인간으로서 다뤄야할 의무가 있다고 느낀다는 것이었다. (…)

우리들 대부분은 질서와 인생에서의 의미를 찾는 것이 집단의 헌신 속에서 가장 잘 수행될 수 있다고 느꼈다. 집단의 헌신 속에서 교훈이 전달되고 집단적 합창이 일어났다. ‘자유승차단’에 관계된 구절들이 흑인 영가, 노동가, 조합가로 불려졌다.

(…) 7월 7일, 40여일 만에 첫 번째와 두 번째 집단이 풀려났다. 우리가 감옥을 떠날 때 감옥에 있는 자유승차단원의 수는 백 명에 가까웠다.

다양한 방향으로 떠나기 전에 우리는 원으로 둘러서서 손을 잡고 노래를 불렀다. “우리 다시 만나리.” 원을 둘러 내 동료들의 진지한 얼굴을 들여다보고 열아홉에서 스무 살인 남녀들의 얼굴에서 주름진 눈썹을 봤을 때, 나는 우리가 다시 만나리란 걸 알았다.
덧붙임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