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기에 앞서
“책 읽어주는 언니”는 여덟살 이상 아동과의 인문학 강좌가 가능한지를 모색하는 일종의 실험으로써 시작되었다. 작년에 첫 발을 뗀 이래로 ‘책언니’의 지향에 공감하는 지역 모임, 도서관, 지역아동센터 등에서 8세~10세 사이의 다양한 아이들을 꾸준히 만나고 있다. 20대 초반의 두 언니들이 선생보다는 친구 같은 관계로 아이들을 만나고, 그림책을 매개로 한 인문학 강좌를 통해 아이들이 원래부터 가진 질문과 상상의 가능성을 잃지 않도록 돕는다. 여기까지가 애초의 기획 취지였는데, 실상은 그냥 애들 만나서 지지고 볶고, 싸우고, 많이 놀고, 세상에 대한 얘기도 아주 조금 나누고, 그냥 그렇게 지내고 있다.
1998년, 장미희 주연의 ‘육남매’라는 드라마가 시작하던 해는 내가 여덟살이 되던 해였다. 이 추억의 드라마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쓰려오는 것은 ‘육남매’가 내 별명이었기 때문이다. (본명이 김남미다. 남미- 남매- 육남매!) 나는 그 별명이 정~말 싫었다. 바보, 멍청이, 똥싸개로 불리는 게 차라리 나을 정도로 싫었다. 반애들은 차마 몰랐을 것이다. 딸만 셋인 집에 장녀로 태어나 일찍이 초딩 때부터 신생아 똥귀저귀 갈아주는 일에 이골이 났던 내가 애가 (셋도 모자라) 여섯이나 되는 그 무시무시한 드라마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나 홀로 외동이거나 형제자매가 한 명 뿐인 절대다수의 보통 애들을 내가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동생 많은 게 쪽팔려 들키지 않기 위해 거짓말도 불사하던 그 때 그 시절. 아, 지금 생각해도 정말이지 힘겨운 나날이었다.
90년대에도 애가 셋 이상인 집은 흔치 않았다. 2000년대에는 더욱이나 나 같은 애는 없을 줄로만 알았건만, 이게 왠걸. 작년에 강화도로 책언니 수업을 갔다가 떡 하니 비슷한 처지의 여덟살짜리 여자애를 만났다. 그 애는 나처럼 딸만 셋인 집의 둘째였다.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간 책언니 수업에서 우리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유림이의 어머님께서 넷째를 잉태하셨다는 빅뉴스였다. “또 동생이라니....” 피곤한 얼굴로 한숨짓는 유림이에게서 스물스물 내 과거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순간이었다. 아들 욕심이 있었던 울 엄마는 딸 셋으로도 모자라 출산을 멈추지 아니하시고, 드라마 제목처럼 결국 여섯을 채우고야 마셨다. ‘육남매’는 기구한 내 운명을 예고하는 치밀한 복선(!)이었던 것이다. 슬며시 넷째는 남동생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유림이. 옛날의 나를 보는 것 같아 웃기기도 하고, 앞으로 얘가 할 고생이 눈에 훤해 불쌍하기도 했다.
과거의 복구, 기억의 위계
이건 그림책 작가 권윤덕 씨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다큐멘터리(그리고 싶은 것)에서 들었던 건데, 그림책 작가들은 아이들이 볼 책을 만드는 직업 특성 상 끈임 없이 자기 어린 시절을 되감으며 산다고 했다. 그 분 나이가 얼추 쉰이 넘어가는데, 몇 십 년이나 되는 긴 세월 동안 끈질기게 과거를 반추하면서 살았겠구나 생각하니 대단하다 싶었다. 이 말에만 착안해서 생각해보면 그림책 작가는 잊혀진 자기 과거를 복구하는 것이 중요한 직업인 셈인데, 여덟살을 만나 말을 건네는 책언니 일도 이와 비슷한 속성이 있는 것 같다.
책언니를 하다보면, 어릴 때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야 할 때가 많다. 애들의 공감대를 얻으려면 뜬구름 잡는 얘기보단 생생한 경험담이 직빵이고, 그런 이야깃거리를 다른 데서 구할 수는 없으니 나에게서 구해야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기억의 복구가 어지간히 잘 안 된다는 것이다. 할 말 많았던 청소년기에 비해 초딩 때 일들은 몇 가지 인상적인 사건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멸. 잘 기억이 안 난다. 수업 만들기 힘들다. 흑.
사람이 살면서 가는 시간 속에 과거를 잊게 되는 것은 뭐, 그래, 신체의 한계에 따른 자연스러운 과정일 것이다. 그래도 책언니를 하면서 여덟살들을 만나다보니, 그 잊혀짐이란 게 정말 그렇게 자연스럽기만 할까 싶었다. 한 개인의 무수한 과거 중에서 기억되는 것은 무엇이고, 탈락되는 것은 무엇일까. 기억에도 현재의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기억과 쓸모없는 기억이라는 일종의 위계가 있다면, 여덟살 때의 기억 같은 건 다시 떠올릴 필요 없는 가장 낮은 급의 기억이 아니었을까.
당신도 한 때는 아이였다
태어날 때부터 어른이었던 사람은 없다. 흔히들 잊고 지내지만 ‘아동’이라는 낯선 타자는 나 자신의 과거였다. 다시 말해, 한 때는 당신도 아이였다는 것이다. 한참 밖에서 청소년 인권 활동을 하며 어린 사람에 대한 존중을 말하던 10대 시절에도 집에 가서는 어린 동생들에게 별 생각 없이 물 떠오라고 시키곤 했었다. 그게 모순적이라는 걸 그 땐 눈치 못 했다. 아동은 내 인지영역 바깥에 있었다. 내가 인지하는 어린 사람은 나였고, 그 때의 나는 열여덟살이었지, 여덟살이 아니었다.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열 여덟살인 나’의 삶으로부터 ‘여덟살인 나’의 과거의 삶이 분리 되고, 단절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과거의 단절은 끈임 없이 이루어진다. 여덟살(아동), 열여덟살(청소년)으로써 한 때 직접 경험했던 것들조차 더 나이를 먹은 (그게 몇 살이 되었든 나의) 현재와 단절되어 공감의 영역 바깥으로 밀려난다. 올챙이의 비극. 개구리가 된 올챙이들은 지금 올챙이가 살고 있는 연못을 돌아보지 않는다. 왜? 자기들은 이미 뭍으로 빠져나왔으니까. 어른이 된 내가 복구해야 할 것은 내 과거의 기억이라기보다는 여덟살과 나 사이의 끊어진 연결고리였다.
화성에서 온 아이, 지구에서 온 어른
영화‘화성아이, 지구아빠’에는 자신을 화성인이라 주장하는 아이가 등장한다. 아동의 세계란 때 묻은 어른들은 절대 닿을 수 없는 외계의 별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말썽 부리는 어린애들을 전혀 이해 못 하는 어른들의 시선을 극대화하면 이렇게‘우리 아이 외계인설’이 나오는구나 싶어서 제목만 보고 그냥 웃었던 기억이 난다.
이 사회에서 어린 사람들의 세계, 언어, 삶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견고하다. 추사랑이나 윤후에게 쏟아지는 관심과 애정을 보고도 이런 말이 나오나 싶겠지만, 아이들의 귀여운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과 이 사회에서 아동이란 존재가 어떻게 소외되고 있는지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갖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후자에 대한 문제제기는 적어도 내가 아는 바로는 한국사회에서 거의 이루어진 적이 없다. 작은 사람들이 큰 사람들의 세상에서 이대로 고립되어 있지 않기 위해서는 책언니들 뿐만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여덟 살과의 연결고리를 되찾아올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책언니 활동이 중간 다리가 되어 화성까지 외따로 격리되어 있는 여덟 살 구역에 더 많은 지구인들을 데려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음 편 예고!
책언니가 되어 뼈저리게 느낀 바, 여덟살들은 절~대 만만하지 않다. 이 친구들이 사는 여덟살 구역에서 모든 어른들은 이방인이다. 책언니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여덟살의 세계에는 그들만의 룰이 있는 법! 그 세계의 법칙을 익히지 못하면, 애들한테 가차 없이 외면당한다. 달콤살벌 ‘여덟살 구역’에 적응하기 위한 어리버리 책언니들의 짠내 나는 고군분투가 시작된다~!
덧붙임
엠건 님은 '교육공동체 나다'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