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는 2005년 2월 용산미군기지 이전협정과 한미연합토지관리계획(LPP) 개정협정이 팽성 주민의 권리를 심각하게 후퇴시키고 있다며 제기한 헌법소원을 전원 일치로 각하했다. 재판부는 기본권 침해의 현재성과 직접성을 부인하면서 “미군기지 이전이 인근 지역에 사는 주민들의 삶을 결정하는 데서 사회적 영향을 미치게 되나, 개인의 인격이나 운명에 관한 사항은 아니며 개인적 선택에 직접적 제한을 가하는 것도 아니다”고 했다. 이들은 평화적 생존권이 우리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이라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그 권리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사실에는 애써 눈을 감은 것이다.
생명까지 앗아간 ‘군사수몰’
이미 알려진 대로 팽성의 대추리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당시 전쟁기지가 들어서면서 이미 두 차례나 강제이주가 있었던 곳이다. 강제이주는 땅과 일자리와 집을 순식간에 앗아가 생존권의 가장 막바지에 다다르게 한다. 1952년 가을 미군은 비행장을 만든다고 불도우저로 살고 있는 집을 무수기 시작했다. 대추리 주민 김석경 씨는 “울타리 담장을 부시고... 그 이튿날부터 사람이 살 수 없다고, 한 100여 호 되는데”라고 기억한다. 현재 미군기지가 있는 옛 대추리에서 살던 주민들은 이렇게 사전 협의는커녕 항의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4백여 년 전부터 갯벌을 막아 만든 갈대원, 섬마을원 등 옛 대추리 농경지는 그렇게 미군비행장에 잠긴 군사수몰지역이 되었다.
그 뒤 김 씨를 비롯한 농민들은 생계를 송두리째 잃고 황량한 갯벌 위에서 다시 농토를 일구어야 했다. 집 지을 터마저 부족해 제비뽑기해야 했던 당시, 유랑으로 떠돌다가 굶주림과 질병으로 숨진 이들도 있다는 것이 당시를 경험했던 주민들의 증언이다. 강제이주가 생존권은 물론 생명권까지 위협할 수 있다는 역사적 실례이다. 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기지 확장을 막아내려는 이유는 이런 끔찍한 경험이 뒷받침되고 있다.
또다시 유랑으로 내모는 정부
현재 정부의 강제수용 역시 국제기준을 철저히 무시하고 주민들이 보장받아야 할 권리를 불도저로 밀어내고 있다. “여기서 떠나서 뭘 먹고 살라는 거냐?”고 주민들은 항변한다.
“여기서 그거(보상금) 가지곤 굶어 죽어. 가지고 돌아다니다가 그냥 정신을 잃어 가지고, 그냥 속상하니께 그럭하다들 그냥 죽는 사람 많어. 여기서 떠났다 하먼 그렇게 되는 겨.” 주민 조선례 씨의 얘기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정부의 보상금으로는 타지에서 주택 마련이 불가능하며 농지를 마련하기도 턱없이 부족하다. “(대추리가) 한 140호 정도 되는데 한 60호 정도가 농사를 안 짓더라고.... 농토가 없어서 못 짓는 집이 40호 정도. ...(옛 대추리에서) 쫓겨날 당시 야산도 많고 밭도 많고 해서 나오면서 그냥 짓고 그런 사람들이 많거든. 그런 사람들이 여기에서는 주민들끼리 지금까지 공유해가면서 지금까지 살었는데 이게 여기서 딱 끝나면 그 사람들은 소득원이 없어지는 거야.” 비교적 젊은 주민인 신종원 씨의 지적은 자기 땅 없는 농민들의 생존권 침해가 더욱 심각할 수 있음을 예상케 한다. 농지의 소유주가 아니더라도 수십 년 동안 경작해 생계를 이어온 사람들의 정주의 권리, 경작의 권리는 미군기지 확장으로 인해 짓밟히고 있다. 이런 조건의 사람들이 이 땅을 떠나게 되면 결국 유랑과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자결권 짓밟고 발전이라니…
주민들의 자결권 역시 내동댕이쳐지고 있다. 정부의 이번 수용 절차는 1952년과 별반 차이가 없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한 25만 1천평 주민들에게 국방부에서 통보를 다 보낸 거예요. 그 땅이 수용되니 가격은 얼마고 그 땅값은 그렇게 그렇게 해서 찾아라.... 평가를 해서 수용이 되는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라.” 주민 김석경 씨는 협의 없이 밀어붙이기 식으로 진행된 수용 절차에 분노를 터뜨린다. 때문에 이후 국방부의 토지측량, 지장물 조사 등이 강행될 때마다 주민들의 격렬한 저항이 이어졌다. 정부는 이를 묵살하고 3월 6일 대추분교 행정대집행을 강행하려다 일단 물러났다. 3월 16일 영농차단을 위해 논밭을 갈아엎은 데 이어 4월 7일에는 수로를 파괴하고 콘크리트를 붓는 천인공로할 일까지 저질렀다. 국방부는 4월 24일 대추리를 군사보호시설로 만들기 위해 군부대까지 투입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의 의사는 철저히 묵살되고 배제되어왔다.
국제인권조약에 명시된 자결권은 인권의 보편적인 원리이자 구체적 권리이다. 정부는 평택미군기지 확장을 ‘안보’뿐 아니라 ‘평택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추진하고 있지만, 자결권을 무시한 안보와 발전은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 정부의 정책 결정은 반드시 해당 인민과 함께 협의하고 동의를 얻어야 하며, 그것이 바로 자결권의 보장인 것이다.
기지 주변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건강 빼앗겨
미군 기지와 이웃하며 산다는 것은 건강권에도 심각한 훼손을 입게 됨을 의미한다. 평택시가 지난 3월 3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역 기지주변 주민들은 전투기와 헬기의 소음으로 인해 심장질환, 정신질환, 난청 등 다른 지역 주민보다 훨씬 높은 건강문제를 안고 있다. 어린이들의 경우도, 우울증과 산만 행동, 자폐증 등이 인근지역 어린이들보다 1.5-2배 정도 더 높게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지장물 조사 이전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에서 실시한 건강조사에서도 이주 대상 주민들은 수몰지구 지역주민이나 일반 노인 인구보다 훨씬 높은 불안 증세를 호소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미군기지에서 흘러나오는 석유기름으로 인한 하천 오염은 평택의 오랜 골칫덩어리이다. 이렇게 미군기지는 그 자체로 주민들의 건강권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강제수용에 따른 인권침해, 국가가 책임져야
모든 강제수용은 국가 정책이나 입법작용으로 일어나는 비자발적 조치이다. 그럼에도 국가는 발전과 안보 논리를 앞세워 강제수용의 불가피함만 내세울 뿐, 비자발적 이동으로 인해 빚어지는 인권침해의 책임은 지지 않으려 한다. 유엔은 세계인권선언(제25조 1항), 경제·사회·문화적권리에관한국제규약(제11조 1항), 인권위원회 결의안(1993/77) 등을 통해 강제수용에 따른 인권침해를 엄격히 막아야 한다고 지적해 왔다. 강제수용 조치의 사유가 정당하다 해도 강제퇴거 위협을 받는 자는 누구나 적법절차나 기타 구제수단을 통하여 자신의 인권을 보호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이주 범위를 이주대상자와 사전 협이 없이 밀어붙이기 식으로 정해서도 안 되며 철거의 규모, 철거에 따른 여러 가지 혼란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못 박는다. 명백한 국제기준을 모르쇠하며 강제수용의 불가피함만을 내세운다면 국가 스스로 인권침해 가해자임을 자임하는 것에 다름없다.
미군 기지와 이웃하며 살아온 팽성 주민들은 평생을 전쟁 같이 살아왔다. 미군은 안보를 이유를 이 땅에 들어왔지만 이웃한 주민조차 안전하게 살지 못하도록 괴롭혔고 이제는 모든 국민들에게 전쟁의 공포만을 가중시키고 있다. 벼랑 끝에 몰린 팽성 주민들의 인권을 구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다. 진정한 사람의 안보, 주민들의 기본적 인권 보장을 위해 전쟁 획책 계획을 버리고 평화를 돋우는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 이 글에 인용된 인터뷰는 『들이 운다』에서 따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