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이번주 [인권으로 읽는 세상]은 인권운동사랑방 20주년을 맞아 그동안 고민하며 나누었던 이야기를 싣습니다. '9.28회동' 대한문에 와서 당신의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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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잘 모이지 않는다. 모여도 잘 움직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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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팍팍하다, 불안하다, 사람을 만날 수가 없다, 먹고살기 힘들다, 바쁘다, 얘기 나눌 시간이 없다, 괴롭다, 죽지 못해 산다, 아프다, 막막하다, 사람대접 받기가 어렵다, 니가 뭔데 날 무시해, 이번엔 내가 참는다, 이러나 저러나 마찬가지, 외롭다, ……. 친구가 그립다, 먹고살 걱정 좀 내려 놓고 싶다, 재밌는 일 하며 살고 싶다, 늘어지게 잠 한번 자고 싶다, 비굴해지기 싫다, 알고 싶다, 인정받고 싶다, 잘 살고 싶다, 그래도 이 맛에 산다, 바람 쐬고 싶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 …….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다. 세상이 이대로 굴러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리 희귀한 마음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여서 함께 살기를 도모하지 않는다. 홀로 안간힘을 쓰며, 이 세계를 살아내고 있다. 사람들의 소박한 바람이 흩어진 채 세상에 소비되어 버리는데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이 저마다 내는 안간힘으로 다시 이 세계가 생산되고 있다는 곤혹스러움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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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를 통해 이윤을 축적하던 시도가 한계에 부딪히자 자본은 신자유주의라는 전략을 밀어 붙이고 있다. 수많은 금융상품이 개발되면서 본격적인 돈놀이가 시작됐다. 경제의 불안정성을 견디기 위해 자본은 생산라인을 쪼개고 나누었다. 공장은 여러 개의 작은 공장들로 나뉘었다. 일손이 필요할 때, 쓰고 필요 없을 때 내보내기 좋은 고용형태가 늘어났다. 시간제, 파견, 하청, 도급, 중규직, 특수고용직 등. 해고가 일상화됐고 정리해고가 손쉬워졌다. 국가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던 철도, 에너지, 물 등이 사유화되기 시작했다. 사회에서 무시되던 돌봄과 보살핌의 노동들이 시장에서 상품으로 조직되었다. 복지는 이와 같은 자본의 전략에 가난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또 하나의 경로가 되었다. 도시도 변모했다. 개발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동네를 남겨두지 않았다. 학교는 점차 따돌림과 괴롭힘을 배우는 곳이 되어갔다. 사회는 타자를 배제하면서 결속을 확인한다. 타자로 지목당하는 사람들이 모이려 들면 혐오가 쏟아진다. 자본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모이려 들면 국가폭력의 응징이 뒤따른다.
우리를 흩어 놓는 힘이 있고 사람들은 어딘가에 흩어져 있다. 흩어져 버린 불만들은 좋은 지배자를 기다리는 바람과 넋두리 사이에 갇혀 있다. 그러나 단지 사회가 변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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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 신자유주의가 충격적으로 각인된 순간은 ‘인권대통령’을 자임하는 통치자가 행정의 수반이 된 순간이기도 했다. 혼자 또는 무리를 지어 국가 기구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세상이 이대로 굴러가기를 바라지 않던 운동들은 차츰 분화되었다. 제도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경향과 제도의 수용을 거부하는 경향 사이의 선이 점점 분명해졌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힘은 반인권 악법을 폐지하고, 비민주적 제도를 개혁하는 방향으로 수렴되어 갔다. 권력을 분산하고 민관이 협력해서 다스린다는 대의로 만들어진 기구들은 사회적 합의를 종용했다. 크고 작은 대중조직들이 흔들렸다. 물러설 수 없는 자리를 지키려 싸웠던 대중운동들은 탄압의 표적이 되었다. 정치, 노동, 여성, 환경, 인권 등등으로 나눠진 자리에서 운동들은 분주하게 움직였으나 분주함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헤아리기 점점 어려워졌다. 민중운동은 힘을 잃어갔다. ‘반독재 민주화 전선’을 대신할 운동들의 결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라는 꿈은 진보정당이라는 제도를 넘어서지 못했다. 운동들이 새로운 통치체제로 휩쓸려갔다. 언제부터인가 운동들은 사람들이 모여들 자리를 만들지 못했다. 애써 모아놓고도 움직이지 못했다. 운동도 법과 질서 사이에 갇혀 있다.
80년 광주를 채우며 한국 사회를 흔들었던 민중의 힘을, 87년 민주화항쟁과 함께 넘쳐흘렀던 노동자의 힘을 그리워하는 것은 철없는 낭만이 되어버렸다. 낭만은 철따라 흘러가도 된다. 그러나 서로의 존엄을 세우려던 열망까지 낭만에 실어 보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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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이 번져 나가다가 혁명의 열기로 터져 나오는, 사람들의 힘이 없다면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훌륭한 사람이, 좋은 제도가, 정치적 올바름이, 창조적인 도전이, 평화로운 마음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이 모두가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스스로 새로운 질서를 선언할 때에만 세상은 달라진다. 연대와 결속의 관계를 복원해야 한다.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는 조직과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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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려는 운동들이 있었다. 민주노조를 만들어 노동자를 억압하는 자본을 멈추려고 했다. 농민회를 만들어 수탈당하는 농촌을 지키려고 했다. 학생회를 만들어 학내 민주화를 넘어 한국 사회를 바꾸는 집단이 되고자 했다. 인권의 가치로 세상을 물들이며 권력을 무너뜨리려고 했다.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힘을 모아 누구도 차별당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려고 했다. 사람대접 받으면서 사람답게 먹고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던 사람들이 그 자리로 모여들던 시대가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들던 자리에서 우리는 서로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만났다. ‘내가 겪었던 부당하고 억울한 일’이 ‘나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만’ 겪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문제의 근본을 탐구하고 학습할 수 있었고 ‘내가’ 누구인지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한 싸움을 함께 결행할 수 있었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나눌 수 있었다. 그 힘이 조직을 넘어 세상으로 넘쳐흘렀고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 자리가 넓어졌다.
그런데 사람들이 점점 모이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조직은 사람들을 매혹하지 못했고 조직으로 스스로를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시당했다. 과거의 조직은 낡은 형식이라는 냉소와, 그래도 조직이 중요하다는 강변 사이에서 사람들은 모여들 자리를 발견할 수 없었다. 다시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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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형식이 낡거나 새로운 것이 문제가 아니다. 어느 때에도, 사람들이 쉽게 모여들었던 것은 아니다. 조직을 만들어 내는 운동의 감각이 문제다. 새로운 관계와 장소들을 열기 위해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운동의 감각이 필요하다. 들으려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사이, 말하려는 것과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 사이에 빈자리가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서로 만나서 기대며 달라질 수 있어야 한다.
조직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놓는 곳이 아니다. 단결된 싸움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같은 문제를 경험했기 때문이 아니다. 같은 문제도 저마다 다르게 인식하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이다. 함께 모여 이야기 나누면서 서로의 경험을 집단적인 경험으로 번역할 수 있는 관계가 조직을 통해 만들어질 때 단결이 가능해진다. 조직은 같은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오히려, 세상이 강요하는 자신의 위치를 이탈할 수 있는 힘을 얻고 집단적 이해관계를 구성해내는 곳이다. 조직은 그것이 가능한 장소여야 한다. 자유를 갈망하고 평등을 예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힘이 조직을 넘나들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힘을 비축하는 곳이 아니라 흘러넘치게 하는 곳이 조직이어야 한다.
그래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조직되어야 할 것은 개인이 아니라 관계다. 조직된 개인의 수가 많아지는 것으로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 물론 그저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으로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관계의 힘이 무엇을 겨누도록 할 것인지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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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은 우리가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음을 설명하려고 했고 그걸 ‘체제’라고 불렀다. 그런데 운동들은 제각각 세상을 인식하는 틀에 사람들의 목소리를 끼워 맞추려고도 했다. 체제를 분석하기 위한 틀의 우선순위를 따질 때에만 ‘체제’가 등장하기도 했다. 한편에서는, 더 이상 ‘체제’는 없다는 주장들이 또 다른 틀이 되었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들은 삭제되어갔고 말할 수 없는 목소리들은 웅성거림으로 남았다. 그래서 ‘자본’, ‘노동’, ‘분단’, ‘가부장제’, ‘차별’과 같은 단어들은 앙상하기만 하다.
그러나 체제를 보고 설명하려는 노력은 여전히 중요하다. 누군가 권리의 양보나 타협을 요구받는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운동이 체제를 이해하려고 했던 것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더 잘 듣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이 어떤 위치를 강요받는지, 사람들의 힘은 어디로 향하는지, 세상은 그 힘들을 어떻게 엮거나 끊어 놓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세상을 바꾸기 위한 힘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우리는 여전히 현실의 문제를 낳는 물적 조건들을 이해하려고 애써야 한다. 우리는 ‘노동’이나 ‘생산관계’를 보지 않고 우리를 이해할 수 없다. ‘정체성’을 통하지 않고, ‘가치’에 대한 분별 없이, ‘언어’에 대한 통찰 없이 우리를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간은 노동력으로만 환산될 수 없으며 정체성으로 환원될 수도 없다. 가치를 따라서만 움직이지도 않으며 언어를 통해서만 소통하지도 않는다.
체제를 들여다보기 위한 각각의 틀은 우리들의 삶을, 세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시야를 열어주고 시선을 만들어주지만 언제나 살아 움직이는 현실로부터 미끄러진다. 그러나 그것은 한계가 아니라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을 독려하기 위한 운동들의 관계를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각자가 미끄러지는 자리에서 다시 보편을 향해 발 딛을 수 있는 자리들이 되어주는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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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조직들이 결속해서 체제를 변혁하자는 전망을 그렸던 시대가 있었다. 대중조직들이 쇠약해지면서 변혁의 선동은 무기력해졌고 결속은 미약해졌다. 여러 집단으로 나뉜 운동들은 변혁의 꿈을 나눌 동료들을 잃어갔다. 아이와 어른, 노동자와 소비자,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등으로 인간집단을 분할하는 것은 통치의 전략이기도 하다. 시간과 공간을 분할하고 각각에 다른 원리가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동등한 사람이라는 인식은 쉽게 잊힌다. 운동들도 서로 멀어지면 그것을 놓치기 쉽다. 주요한 문제와 부차적인 문제를 헤아리려는 노력이 중요한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을 구분하는 것과 혼동되기도 했다. 때로는 집단과 집단의 대립이나 갈등이 본질화되거나 무시되었다.
전망이 희미해진 자리들을 여러 연계들이 채워서 버티고 있다. 결속을 부르짖는 것도, 연계로 충분하다 말하는 것도 부족하다. 쪼개진 운동들을 넘나들 수 있는, 서로의 통찰을 나누며 북돋울 수 있는 연결이 복원되어야 한다. 운동들의 연결은 각각의 자리에서 보편의 실마리를 찾으며 한걸음씩 서로를 향해갈 때 이루어질 수 있다. 운동들의 위치와 관계를 모색하면서 체제에 맞설 힘을 만들어낼 궁리를 해야 한다.
노동자, 여성, 청소년, 장애인, 시민, 학생, 성소수자, 홈리스, 철거민 등의 이름들은 ‘사람’에 붙을 수 있는 여러 이름들 중 하나일 뿐이다. 다만 그 이름을 통해 더욱 잘 알게 되는 세상의 진실이 있고, 서로를 응원하는 관계들의 결속이 시작되는 것이다. 운동들의 연결은 여러 이름을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잇고 엮어서 ‘우리’를 구성하는 노력이다. 관용이나 역지사지가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해치는 물적 조건들을 인식하고 연결이 가능하게 할 물적 조건들을 탐색해야 한다. 인식이나 탐색은 관조가 아니다. 기존의 관계에 스스로를 밀어 넣는 실천이다. 서로의 이야기들에서 ‘나’와 ‘세상’을 읽을 때 ‘우리’의 이야기도 만들어질 수 있다. 우리는 이름 너머의 ‘사람’을 볼 수 있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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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은 조직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연결의 어느 지점에서 체제를 거스르는 힘이 세상으로 흘러넘칠 때 ‘대중’이 등장한다. 80년의 ‘민중’, 87년의 ‘노동자계급’이 그렇다. 그것은 현실의 질서를 비틂으로써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가 그 질서 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체제의 거대한 힘을 벗어나기 어려운 조건을 구성하기도 하지만 우리들을 통해서만 이 질서가 바뀔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질서에 순응하기도 하지만 벗어나려는 힘을 내기도 한다. 흩어진 자리에서 제각각의 존엄을 향해 내는 안간힘과 소박한 바람들을 엮어야 한다. 대중의 힘을 조직하자.
인권의 역사가 던져온 질문도 그 자리에 있다. 인간의 존엄은 어떻게 훼손되고 있으며 어떻게 구성될 수 있는가. 조금씩 만들어져 온 대답들이 정의를 판단하는 기준이나 권력을 제한하는 규범으로 굳어져 왔다. 그러나 기준과 규범으로 포획되는 인권은 현실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지우기도 했고, 섣불리 선언되는 보편은 체제를 더 이상 들여다보기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인권의 힘은 대답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답에 갇히지 않고 서로의 존엄을 세우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온 힘이 인권의 힘이다.
인권은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이고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편지이고 움직임을 여는 질문이다. 운동은 움직임이고 흐름이다. 몸을 쓰는 것이고 위치를 바꾸는 것이다. 존엄을 배분하는 체제에 맞서, 인간의 존엄을 선언하는 보편의 언어를 다시 길어 올리기 위해 인권의 질문을 함께 나누고 싶다. 사람들이 모여서 움직이는 자리에서만 인권이 살아 있는 언어일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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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여야 모일 수 있고 모여야 움직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