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주]
한국사회에서 임신과 출산은 인구정책의 기조에 따라서 국가로부터 관리되고 간섭받는 영역이었다. 임신을 중단할 것인가 지속할 것인가의 문제에서도 철저하게 국가가 허용하는 사유와 처벌하는 사유가 나누어져 있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성관계와 양육 등의 문제에 대해서 장애를 가진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해 고민하며 <장애/여성 재생산권 새로운 패러다임 만들기> 기획단이 활동해왔다. 앞으로 8차에 걸친 연재를 통해서 장애/여성의 재생산권리에 대해 다각도로 살펴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 연재는 비마이너와 공동게재된다.
인구,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사회에서 임신과 출산은 인구정책의 기조에 따라서 국가로부터 관리되고 간섭받는 영역이었다.” [장애X젠더, 재생산을 말하다] 기획연재를 소개하는 편집인 주의 첫 문장이다. 장애여성의 재생산권을 확보하는 데 있어서 국가주도의 인구정치가 걸림돌이 되어 왔다는 문제의식이 이번 기획 전체에 깔려 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특히 국가주도의 인구통제가, 그것도 심지어는 가족계획과 출산장려라는 상반된 방향에서 지속되어 오면서 재생산과 관련된 여성들의 자율적 결정과 권리 행사를 억압해 온 한국의 역사를 생각한다면, 장애여성의 재생산권을 고민하는 기획단으로서는 인구정치에 비판적인 게 당연하다.
그런데 막상 인구정치의 무엇이 문제인가를 질문하기 시작하면 그 질문에 답하기가 쉽지는 않다. 사회현실을 인구라는 틀로 파악하고 사고하는 방식 그 자체는 이미 국가나 경제전문가들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익숙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살 거라고 예상하고 노후를 준비해야 할지, 나와 비슷한 특질을 가진 사람들은 얼마나 존재하고 얼마나 흔하거나 드문지, 나와 동시대 사람들은 대체로 어떤 삶의 경로를 밟아 가는지, 특정한 질병에 걸릴 확률은 얼마나 되며 그래서 예방에는 얼마나 신경을 써야 할지, 보험이라도 들어둬야 하는 것은 아닌지 등 우리가 일상적인 결정을 내릴 때 인구와 통계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구는 19세기 이후 통계학이 발전하면서 국가 통치의 중요한 영역으로 등장하였다. 그런데 통계학이라는 말 자체가 어원 상 국가의 학문을 의미하듯이, 통계를 통해서 인구에 관한 사실들을 생산해내는 것은 오랫동안 국가 통치의 영역이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중요한 변화는 국가뿐 아니라 일반인들 역시 공동체나 민족, 국가 등 집합적 삶을 상상할 때 인구라는 개념을 통해서 보는 일에 익숙해졌다는 점이다. 인구적으로 파악된 사실은 비록 개개인의 삶의 맥락과는 맞지 않더라도 집합적 실체로서의 인구 자체가 고유한 논리나 규칙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은 이미 현대사회가 사회적 현실을 파악하는 중요한 방식이 되어 있다. 개인이 자살을 감행하는 이유야 다양할 뿐 아니라 사회적인 요인들에 큰 영향을 받는다 할지라도, 통계적으로 겨울에 자살이 많다고 하면 결국 계절이 자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인구에 대한 분석을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통찰도 많고, 사회적 삶을 더 깊이 있게 파악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인구에 대한 개입이 실제로는 매우 정치적임에도 불구하고 비정치적인 것으로 포장되어 왔다는 점이다. 이는 인구가 정치의 영역이 아닌 경제 발전에 부합하는 가장 적정한 사람의 수를 산출하고 수명과 건강을 관리할 수 있도록 하는 객관적 지식의 문제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아도 나치즘 하의 독일을 비롯해서 국가 주도의 인구 정책이 시행된 곳 어디에서나 정치적인 성격이 분명했고, 신체에 대한 개인의 권리나 자율적 개체로서의 개인이라는 근대적 관념을 침해하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한국사회에서 저출산 논의를 할 때 저출산 자체는 마치 논란의 여지가 없는 객관적인 위기 상황인 거 같이 취급하는 데서도 확인되듯, 여전히 인구는 그저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결국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인구정치가 어려운 이유는 인구적인 사고를 무조건 배격하고, 국가의 개입을 거부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인구라는 것이 이미 국가통치에서뿐 아니라 일반인들의 일상에서도 현실을 파악하는 하나의 방식이 되어 있다는 점은 앞서도 지적했지만, 결국은 사회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는 출산과 보육에 대해 국가가 적절한 지원을 하지 않았을 때 생기는 문제들을 우리는 현실에서 충분히 경험하고 있기도 하지 않은가. 특히 장애여성의 경우 재생산권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지원은 필수적이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국가개입이나 인구 자체를 문제라고 보아 배척하기보다는, 현재의 인구정책이 왜 문제인지를 꼼꼼히 따져서 마치 객관적인 사실인 듯 제시되는 인구적 사실들과 거기에 기반한 정책을 거부하되 재생산권 확보를 위해 필요한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해 가는 일이다.
재생산권과 재생산 정치
개인의 권리를 제약하고 특히 여성들의 생식력을 통제하는 인구 정책이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 것은 재생산이 가지는 특별한 성격 때문이다. 재생산은 특정한 집단이 과거와의 연속성을 가지면서 전통을 계승해서 미래로 이어지리라는 전망을 상징한다. 재생산 영역에서 인구 역시 단지 수나 질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미래와 관련하여 강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국가나 민족이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사이에 지속되는 것으로 보는 과정에서 공동체가 살아남으려면 개인들, 특히 여성들의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는 사고가 정당성을 얻는 것이다. 결국 재생산이라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든 단지 구성원을 수적으로 충원한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으며, 한 사회의 문화와 제도, 가치 등을 생산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재생산을 넓게 보아 재생산의 사회적 의미와 지원 필요성을 강조하게 되면, 재생산에 있어서 자기결정권이라는 것이 개별 여성이 소유하는 권리로 보기도 어렵다. 다시 말하면 재생산이라는 것이 좁은 의미에서 여성 몸에서 일어나는 생식 현상이라고 볼 수 없기에, 내 문제니까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자유주의적 권리 개념이 애초에 통용되기 어려운 영역이 바로 이 재생산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재생산권을 여성 개인이 배타적으로 소유할 수 없다고 해서, 다른 누군가에게 귀속되는 권리인 것은 결코 아니다. 태아가 장애가 있다고 해서 임신한 여성 마음대로 인공적인 임신중단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임신한 여성의 처지나 생각을 무시하면서 다른 가족구성원이나 국가가 결정해도 되는 것은 결코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실 재생산권이라는 용어가 나타나 힘을 발휘하게 된 배경을 보면, 그것은 직접 출산과 양육을 담당하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제약과 통제에 대한 저항의 의미였지, 개인주의적 권리를 말하기 위함은 결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재생산권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구체적인 맥락이나 현장을 두고 지금 여기에서 이 여성이 스스로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억압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를 묻는 데 있다. 실제로 재생산을 둘러싼 결정에서 누가 권리를 행사하는지, 누구의 재생산은 환영받고 누구의 재생산은 사회적으로 문제시 되는지 그 양상은 매우 불평등하고 불균등하다. 다시 말해 여성이라고 다 같은 처지인 것도 아니며, 인종, 나이, 계급, 장애 여부에 따라 재생산 과정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나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자격이 매우 불평등하기 때문에 재생산 정치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결국 재생산권은 재생산 정치와 함께 문제 삼을 때만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누가 여성의 권리 행사를 가로막고 있으며, 누가 여성의 몸에 대해 권리를 행사하고 결정을 하려고 하는가, 그 과정에서 여성들 사이의 차등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등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결여된 채 단순하게 “내 몸의 주인은 나”라고 외치는 자유주의적인 재생산권 담론은 그 자체로 문제를 낳게 된다. 장애여성의 재생산권 논의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재생산권이라는 것이 어느 개인이든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거나 국가가 지원을 해주기만 하면 완전하고 독립적인 권리로 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현실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권리이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장애여성의 임신 및 출산권을 논하는 재생산권 논의는 반드시 재생산 정치 논의와 함께 가야 한다.
장애여성의 재생산권 확보를 위하여
장애여성의 재생산권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재생산 권리가 단지 출산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며 재생산은 임신이나 출산, 낙태뿐 아니라 양육과 교육을 포함하고 노동과 가족의 문제에까지 걸치는 포괄적인 현장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그저 이론적으로 재생산권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장애여성의 재생산 행위를 가로막고 있는 구체적인 재생산 정치에 대한 문제제기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일은 현실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함의를 가지는 것이다. 여성의 생애사에서 연애-결혼-출산-양육에 대한 결정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것이지만, 특히 장애를 가진 여성이 한 개인으로서 사회적으로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재생산을 둘러싼 결정들은 그 중요성이 더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녀가 가질 수도 있을 장애에 대해서 역시 장애여성의 심경은 복잡할 수밖에 없고, 개인마다 입장 차이가 크기도 하다. 이렇게 장애여성들 사이에도 의견이나 처지의 차이가 많이 다를 수 있음을 인식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데, 실제로 임신하고 출산할 수 있는 권리에 장애여성 재생산권의 모든 초점이 맞춰질 경우 다른 장애여성들의 재생산권은 오히려 제약과 침해를 받게 되는 결과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재생산이라는 것 자체가 그저 임신과 출산에 대한 것만은 아니듯이 장애여성의 재생산권이라는 것 역시 임신과 출산, 양육에 대한 지원만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장애여성이 자기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내기 위해서는 출산의 권리뿐 아니라 출산하지 않을 권리도 있어야 하며, 피임하거나 낙태할 수 있는 권리와 함께 본인의 의사에 반해 피임이나 낙태를 강요받지 않을 권리도 필요하다. 장애여성의 필요에 맞춘 양질의 의료적 지원을 받을 권리도 필요하지만,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강요되는 의료적 개입에 대해서는 거부할 권리도 필요한 것이다. 또한 결혼을 하지 않고 출산을 해도 적절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권리, 양육에 있어 상황에 맞는 적절한 지원 등 장애여성은 재생산권 확보를 위해 넓은 의미에서의 재생산에 대해 얼핏 보면 모순되어 보이는 전면적인 지원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요구는 현실적으로 민족주의에 함몰되어 있는 국가주도의 출산장려정책 속에서는 관철되기 어려운 것이지만, 또한 국가지원 없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장애여성의 재생산권은 그저 인구관리 자체나 국가개입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는 확보될 수 없으며, 동시에 추상적인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으로도 확보될 수 없다. 결국 지금 현재 인구 재생산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재생산 정치에 대한 분석과 적극적 개입을 통해 국가정책이 장애여성들의 삶의 필요에 응답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더 많은 지원 요구와 더 이상의 억압은 사양한다는 이중적 요구를 힘 있게 해내기 위해서는 결국 현실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덧붙임
백영경 님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인류학 교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