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봄에 꽃들은 피어야 할 때를 감 잡지 못한 듯이, 어렴풋이 피고 지었습니다. 어느새 등줄기가 축축해지도록 햇살이 따사롭습니다. 벌써 여름 더위가 오나 싶은데, 3월부터 시작한 자원 활동도 계절이 흐르듯 덩달아 빠르게 지나 6월에 접어듭니다. 자원활동가이지만 열심을 내지 못해 하는 둥 마는 둥, 사랑방을 오갔는데. 사람사랑에 글을 쓰자니 부끄러운 마음이 한 가득입니다. 아,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전, 사랑방에서 사회권팀 자원활동가로 기웃거리는 대학생 형수입니다.
자원활동가 그 말뜻을 보니, 스스로 원해서 하는 활동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원하길래? 인권단체 자원활동가가 원하는 일, 제가 하길 원하는 일이 뭔지 이제야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무턱대고 사랑방 대문을 두드렸는데 말입니다. 아마도 제가 원하는 일은 다른 분들의 생각과 다름없이 한 사람의 권리를 함께 지켜나가는 것,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겠지요. 사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것은 일상 속에서 펼쳐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원한다는 것과 그 일은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따로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 같습니다.
분명 저는 인권을 함께 지켜야 하는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결국, 사람을 사랑하는 삶이 낯선 곳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낯설음이란 정서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고, 두려움은 그 정서를 피하기 위해 거부감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저를 비롯한 몇몇의 사람들은 인권을 지키는 삶이 주는 낯설음과 두려움, 그에 대한 거부감으로 다른 이를 등지고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사람에 대한 거부감과 무관심으로 익숙해진 삶이 관성이 되어 한치 앞만 보고 달렸던 지난날이었습니다.
관성은 외부의 힘이 주어지지 않을 때 물체가 처음 상태를 유지하는 힘이라고 합니다. 무관심과 이기적인 삶의 관성에 충격을 주는 일이 살다보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사회란 곳이 사람들과 부대끼는 곳이니 삶의 운동원리가 관성으로만 구성될 수는 없나 봅니다. 나에게 충격을 주는 외부의 힘이 쌓이고 쌓여 다른 이의 얼굴을 보게 했습니다. 시골에 살았던 저는 농촌에 시집온 동남아 여성들을 보게 되고, 그들이 겪는 문제들을 언론을 통해 접하게 되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세상을 보는 눈이 트일 즘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는 각 종 문제에 귀가 기울여 졌습니다. 가까운 과거를 돌아보면, 촛불시위를 과잉 진압하는 경찰들이 보이고, 살 곳을 빼앗고 사람들을 내쫓았던 평택 대추리와 용산이 보입니다.(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이 있겠지요.)
이런 이유로 사랑방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빚진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의 권리를 함께 지켜보자는 마음에서 말입니다.(익숙함이 낯설어지는 순간, 삶의 관성이 깨지고 함께하는 삶을 소망하게 되나 봅니다.) 사랑방에 와서 보니,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땅이 생각보다 더 무서운 곳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사회권팀에서 우리 사회에 가장 약한 고리에 묶여 살아가는 청소노동자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엿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성, 비정규직, 고령, 저학력의 고리로 얽혀 잊혀진 존재, 유령으로 살아가는 분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방을 통해서 더 많이 보고 들으며 깨닫게 되니 말입니다. 헌데, 한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제가 사는 한국사회는 교환과 거래로 삶의 방식이 획일화 되다 보니, 제 과거의 무관심과 현재의 참여를 교환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함께 하는 삶이 제 삶의 길이 되어야 하는데, 자원활동을 핑계로 마음의 빚을 탕감하고, 제 주변의 더 많은 다른 이를 보지 않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동시에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게 되기도 합니다. 사랑방에서만 자원활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아직은 사람을 사랑하는 길이 삶의 길이 되도록 더 애써야할 모양입니다.
활동가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