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가 야기한 문제와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회의가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람들은 스마트폰이 열어젖힌 신세계에 환호하며 디지털 경제가 4차 산업혁명을 시작했다며 칭송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세계 경제가 얼어붙고, 기후위기, 생태위기의 주범으로 자본주의가 지목되면서 경제를 넘어 삶의 지속가능성이 화두가 되었다. 이번 경험을 계기로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로 나아가자는 주장들이 넘쳐났다. 다들 자본주의의 탐욕을 비판했지만 이번에도 자본주의는 살아남았다. 아니,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거대한 투기판에서 마지막 기회라도 잡아야 한다는 듯 다들 주식, 부동산, 암호화폐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인권운동으로서 체제 변혁에 대한 지향을 분명히 해 온 사랑방은 사람들의 삶을 조건 짓는 물질적 구조로서 노동세계에 대한 고민과 실천들을 꾸준히 해왔다. 노동세계에 대한 고민과 실천은 자연스레 이를 규정짓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관심으로 이어졌다. ‘위기’가 일상화되고 어떤 형태로든 체제의 변화가 직감되는 현재, 한편에서는 인공지능과 탈노동 사회의 도래, 기본소득이 주장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성장의 한계에 봉착한 자본주의가 예견되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인상비평을 넘어, 정말로 넘어서고 싶다면 도대체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무엇을 바꿔내야 할지부터 차분히 짚어볼 필요가 있었다. 마침 현대 자본주의 경제 현상들을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쉽게 풀어낸 책이 출간되었다. 그렇게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 세미나와 저자 초청 특강이 진행되었다.
노동가치론으로 보는 자본주의
자본이 축적한 권력과 이윤의 토대로서 ‘노동’을 떠올리는 것은 점점 쉽지 않다. 도대체 그 ‘노동’이 무엇인지도 헷갈리기 시작한다. 노동이 돈을 만드는 게 아니라, 돈이 돈을 만드는 게 확실해 보이는 세상이다. 나날이 커져가는 금융시장은 새로운 상품들을 계속 만들어내는데 금융 상품 자체가 담보 역할을 하면서 자산시장은 한없이 커져만 간다. 또한 금융시장은 금융상품의 미래 성장가능성에 대한 ‘기대’로 움직이는데, 아직 오지 않은 ‘미래’와 ‘가능성’, ‘상호신뢰’와 ‘기대’와 같은 주관적 믿음이 자산의 토대가 된다. 지난 몇 년 사이에 폭등한 주식과 부동산 시장이 그렇듯이 말이다. 최근 암호화폐 폭등은 이를 가장 완벽하게 실증하는 사례이다.
중요한 건 거품은 꺼지기 마련이고, 큰 거 한 방을 노린 사람은 쓴 맛을 볼테지만 결국 누군가는 손에 쥐게 되는 화폐, 청구권은 종국에 무엇으로 지불되느냐이다. 화폐가 힘을 갖는 것은 액면가만큼 다른 재화나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매를 통한 지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화폐는 그냥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 노동가치론은 바로 그러한 재화와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인간의 수고 즉 ‘노동’이 가치의 토대라고 보는 것이다. 주식이든, 부동산이든, 암호화폐든 그 가치의 실현은 이러한 노동에 기반할 수밖에 없는데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금융시장은 그 공간적 토대를 지구적 수준으로 확장하고 국가와 개인이 지는 신용(빚)을 통해 향후 수십 년 동안의 미래를 담보로 잡는 시간적 확장을 이뤄냈다. 말 그대로 ‘저당잡힌 삶’이다. 최신의 회계, 금융기법이 계산하고 예측하는 자산시장과 복잡한 경제지표가 보여주는 현재란, 결국엔 우리와 미래 세대의 삶과 노동을 저당잡고 소비하는 자본주의 세상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에서는 화폐와 금융에 대한 노동가치론에 따른 분석을 강조한다. 이는 최근 한국에서 소득주도성장과 정부의 과감한 재정 정책을 요구하는 흐름에 대한 경계 때문이기도 하다. 경제에 대한 객관적 분석은 한 쪽으로 밀쳐놓고 마치 돈이 돈을 만드는 도깨비방망이라도 되는 것인냥 정치권이 나서서 선동하는 우려스러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돈, 화폐가 우리의 삶을 풍요롭고 조화롭게 만드는 게 아니라, 개인들이 ‘노동’이라는 사회적 분업을 통해 사회적-개인적 필요와 가치를 함께 생산한다.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실천은 모두에게 돈을 나눠주는 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노동’을 어떻게 정의롭고 지속가능하도록 나누고 조직할 것인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
경제성장이란 무엇인가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의 핵심 테마 중 하나는 지속적인 성장을 전제로 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작동 불능이다. 자본주의에서 경제성장은 자본축적, 즉 이윤율 증대를 통한 자본 증대에 있다. 하지만 노동절약적 자본주의 기술발전의 편향은 물질적 풍요와 소비로 이어지는 대규모 노동 추출에 실패한다는 것이다. 기계화에 따른 상품의 과잉생산과 자본축적의 중단은 자본주의 경제를 작동 불능 상태로 만드는데, 역사적으로 몇 차례 반복된 ‘공황’이 그 사례이다.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는 지난 수백년 동안 우여곡절을 겪으며 나름의 방식으로 인류의 자유와 풍요를 조직해온 자본주의가 이제 그 역할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 방식의 경제를 조직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대안으로 시도되었던 역사적 사회주의와 현재 대안처럼 이야기되는 포퓰리즘에 대한 비판적 평가로 대신한다.
그런데 ‘경제성장’은 기후위기로 대표되는 생태 위기라는 측면에서도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과거의 기준으로 인류가 ‘성장’을 한다는 게 물질적으로 불가능한 상태에 다다르고 있다는 신호가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경쟁과 폭력’을 통해 인간과 자연을 동원하고 착취하는 시스템을 완성했다. 그 한계점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는 가운데 ‘경제적 붕괴’와는 다른 경로의 ‘탈성장’에 대한 고민과 실천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탈성장’이 물레를 돌리는 개인적-집단적 금욕실천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서는 다시금 인간과 자연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지, 사회가 어떤 노동을 함께 조직하고 가치를 평가하고 유지할 것인지의 문제로 돌아가게 된다.
자본주의는 자연이 아니다
왜 ‘불평등과 생태위기’의 원인으로 ‘자본주의’는 비판과 극복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가? 비평은 넘쳐나지만 ‘자본주의’는 진지한 극복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서로 관계 맺는 일반적 형식인 ‘노동’이 삭제되고 이를 대체하는 상품/화폐관계만이 전면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상품/화폐/시장이 없이 현대 사회에서 타자와 만나는 방법을 상상하기 어려워진 우리에게 자본주의는 ‘저절로 존재하고 원래부터 있었던’ 자연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역사를 통해 자본주의가 자연이 아닌 역사적 산물임을 알게 된다. 자본주의는 누군가의 발명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인간 본성에 적합한 자연도 아니다. 끊임없는 투쟁과 경합 속에서 형성된 역사적 구성물이다. 누구나 ‘위기’를 직감하는 이때, 새로운 세상을 향한 고민과 실천은 ‘자본주의’를 변혁의 대상으로 놓는 작업으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