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7일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의 방향과 전략을 모색하는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전략워크숍>에는 반가운 얼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습니다. 조금씩 길어진 사람들의 소매가 5월 국회 앞 농성과 단식투쟁 마무리 이후 3개월의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했달까요.
한동안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활동이 뜸하다고 느끼셨다면 사실입니다. (^^;) 물론 대외적이고 가시적인 활동이 잘 보이지 않았다고 해서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이 멈춰있었던 것은 아니지만요. 대국회 투쟁에 집중했던 21대 국회 상반기를 각 단위별로 또 전체적으로 평가하는 시간을 갖고, 뜨거웠던 투쟁만큼 어느새 훌쩍 커지고 복잡해진 조직과 체계를 정비하다 보니 가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포기할 수 없는 평등의 원칙,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운동의 전략을 우리가 서 있는 한국사회의 지형 속에서 다시 새롭게 만들어가야 할 필요 속에서 차제연 전략워크숍이 열렸습니다.
‘평등의 원칙’ 앞에 멈춰선 정치 속에서도
21대 국회가 개원한 후 반환점을 돌았고,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첫 정기국회가 100일의 여정을 예고하며 9월 1일에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근간을 ‘정상화’하겠다는 윤석열 정부에 대한 기대는 대통령의 지지율만큼이나 낮고, 민생정당으로 거듭나겠다는 여당이나 민생제일주의를 내세우며 정부와 여당에 대한 비판을 이어가는 야당의 정치에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지 까마득하기만 합니다. 정부, 여당과 야당이 너나 할 것 없이 중요하다고 외치는 바로 그 ‘민생’에는 차별과 불평등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없는 대다수 시민들의 삶은 지워진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정기국회 개원을 앞두고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발표한 논평에서 짚고 있듯이, 불평등을 타파하지 않은 채 ‘시민의 삶’이 나아질 리 만무합니다.
사실 전략워크숍에 참여한 활동가들의 표정이 가벼울 수는 없었습니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될 수 있는 정치권의 조건은 이전보다 더 험난해 보이고 불투명한 것이 사실입니다. 차별금지법이 일률적으로 적용되면 개인의 자유가 침해될 소지가 있다고 말했던 대통령 후보는 구조적 성차별을 부정하며 차별은 개별적으로 구제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된 지금은 여성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 강화’를 핑계로 여성가족부 폐지를 외치고 있지요.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수적 과제라면서도 성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할 의사는 없었던 대통령 후보는 ‘갈등 격화’를 이유로 책임을 회피하기 바빴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정부와 여당이 시민들의 삶을 무력화시키고 있다며 앞장서 비판하는 야당의 당대표가 되었습니다. 지난 대선과 지선에 이어서 본격적인 총선 국면으로 접어드는 내년이면 정치인들의 생명 연장을 불안하게 하는 모든 첨예한 정치적 의제가 갈등으로 치부된 채 공론장에서 사라질 거라는 예측도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제 ‘국회의 시간’이 오기를 기다릴 때라고 생각하기란 더 어려운 일입니다.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시민들의 요구가 조직되고 성장하고 가시화되지 않는 이상 정치권이 먼저 나서서 국회의 시간을 앞당기는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우리는 정치의 실패를 확인한 바로 그 자리 위에 서 있기도 하지만, 차별금지법 제정을 지지하는 사회적 목소리를 짧은 시간 안에 폭넓게, 하지만 폭발적으로 확장시켜 온 공통의 경험 속에 서 있기도 하니까요. 지금은 그 경험 속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걸 서로 되새겨주는 반차별 운동의 동료들이 소중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단단하고 완고한 절망을 깨뜨리는
전략워크숍을 위해 대관한 성소수자부모모임의 새로운 공간을 꽉 채운 30여 명의 차제연 소속단위 활동가들이 모둠별로 둘러앉아 나눈 고민들은 어찌 보면 이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새롭게 들어선 윤석열 정부와 여전한 거대양당 체계 하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에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 한국사회의 혐오정치, 특히 성소수자의 권리를 배제하려는 세력과 이에 조응하는 정치권을 어떤 힘으로 넘어설 수 있을까, 차별의 구조와 복합적인 차별 경험을 가시화하는 차별금지법 제정의 의미를 어떻게 대중적으로 더 알리고 단단한 사회적 여론으로 만들어갈 수 있을까…
물론 그 고민에 대한 답도 이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갈등을 회피하고 민주주의를 지연시키는 침묵에는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를 가시화하는 대중들의 목소리로, 구조적 차별을 부정하거나 방치하는 정치에는 ‘모두의 권리’를 요구하는 선언과 행동으로, 권리가 필요한 이들을 쪼개고 고립시키는 혐오정치에는 함께 권리를 외칠 동료들을 엮고 넓히는 연대로. 지금까지 세워온 운동의 원칙을 끊임없이 말하는 것이 반차별 운동으로서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이 해 온 역할이기도 합니다. 누구도 평등으로부터 배제될 수 없다는 원칙을 고집스럽게, 하지만 ‘하나의 차별은 있을 수 없다’는 인식을 확장하면서 모두가 외롭지 않게 더 잘 싸워나갈 방법을 찾아가고 싶은 것이 전략워크숍에 참여한 이들의 공통적인 바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를 잘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업 계획도 잘 세워야겠지만요…!)
“…구체적인 사람들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걸 위해 작은 활동이라도 조직하다 보면 뭔가 이 견고한 파국에 미세한 틈이라도 낼 수 있고 그 틈들이 점점 커질 수도 있지요. 우리 자신이 작은 연대의 흐름이라도 만들고 서로 보호할 수 있는 작은 구멍들을 무수히 뚫어 이 단단하고 완고한 절망을 스펀지같이 만들어야 하지 않나…”
얼마 전 새로운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를 펴낸 진은영 시인의 인터뷰를 읽었습니다. 최소한의 인간적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는 칼럼을 본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인터뷰가 더 눈에 들어왔습니다. 인터뷰 중 단단하고 완고한 절망은 사라지기보다 함께 연대하는 사람들을 통해 ‘견딜만한 것’이 된다는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제 각자의 영역에서 차별과 부정의로 인한 절망을 직면하면서도 바로 그 견딜만한 장소와 관계를 만들어온 운동들이 다시 또 서로를 연결하며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을 해 나갈 시간이네요. 평등의 원칙을 훼손하는 흐름의 틈새를 더 크게 만들어갈 시간, 얼마 남지 않은 올해도 부지런히 움직여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