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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덕후의 사랑

계엄으로 나라가 많이 시끄럽습니다. 사랑방에서도 여러 고민을 안고 지난 7일 집회에 다녀왔는데요. 아이돌 응원봉들이 눈에 띄더라구요. 최근 아이돌 팬들 사이에서는 [OO(아이돌 이름)아 살기 좋은 세상 만들어줄게]라는 지난 박근혜 탄핵집회 때 피켓 사진이 다시금 회자되고 있습니다. 아이돌을 향한 팬들의 사랑은 참 무엇일까… 문득 궁금합니다. 사실은 항상 궁금합니다. 제 얘기거든요. 이번 편지에선 저의 덕질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제가 아이돌 덕질을 한 지는 꽤 오래됐습니다. 초등학생일 적에는 세상이 한창 소녀시대, 샤이니, 동방신기, 원더걸스, 빅뱅, 투애니원 등 떠들썩했고, 중고등학교 땐 엑소, 레드벨벳, 인피니트, 방탄소년단 등이 제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네요. 얼마 전에는 문득 생각이 나 ‘브로마이드’라는 이름의 잡지를 집 한구석에서 찾았습니다. 오른쪽 귀퉁이에 “완소가격 1,000원”이라는 2000-2010년대 즈음 물가가 적힌 잡지가 3권. 이젠 제 기억에 권지용으로 남은 그룹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 시절 저는 꽤나 그 그룹을 좋아했나 봅니다. 지금은 찾을 수 없지만 연예인 이름으로 된 명함도 사서 가방에 달고 다녔고, ‘UFO타운’이라고 아이돌에게 직접 유료문자도 보내보고, 컴백이 올 때마다 다른 그룹을 좋아하는 애들끼리 은근한 신경전을 벌였던… 그런 다채로운 기억들이 어렴풋이 납니다.

저는 일단 노래 좋으면 찍어먹자-는 주의라서 수많은 아티스트가 제 가슴을 스쳐지나갔지만, 그래도 나름 유구한 핑크블러드(핑크색 로고를 가진 sm엔터테인먼트의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랍니다. 제가 제 손으로 산 첫 앨범은 샤이니의 미니2집인 <Romeo>입니다. 앨범 수록곡부터 컨셉까지 ‘아, 이건 소장해야겠다’는 느낌이 찌르르 왔달까요. 그렇게 기나긴 수험생활을 마무리하기까지 이 그룹을 오래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참 왜 그랬나 싶지만, 공부에 방해될까봐 친구들과도 가까이 지내지 않던 시절이었는데요. 제 마음을 많은 부분 이 그룹에 기댔던 것 같습니다. (사실 덕질을 시작한 이래 제 인생이 그렇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 과거는 어느 시절 누구의 어떤 노래로 기억되기도 합니다.) 수험생활을 마친 뒤에는 같은 회사 후배들인 NCT를 좋아하게 됐습니다. 얼마 전에 동기를 만났는데 “아직도 좋아하냐”고 하는데 웃기더라구요. 아, 정녕 기침과 사랑은 못 감추는구나. 얼마나 주접(?)을 떨고 다녔던 거니. 과거의 나야. 하면서요. 아실 분들은 아시겠지만, 한 그룹에 20명이 넘는 크나큰 그룹입니다. 이해를 돕자면… NCT라는 ‘학교’가 있다면 그 안에 기본적으로 DREAM, 127, WayV, WISH(으아 인쇄본에는 깜빡!했습니다ㅠㅠ)라는 ‘학급’이 있구요. 가끔 NCT U라는 ‘동아리’가 생깁니다. 2018년 즈음엔가, 가까운 동기가 하도 얘기를 하고 뮤직비디오를 보여주길래 찾아보다가 좋아하게 된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요. 왜 사랑은 가랑비에 옷 젖듯 하게 되는 거라잖아요. 처음에는 그룹 이름답게 NEO(새로운-)해서 ‘얘네 뭐야’ 했는데 스며들었다죠. 노래를 좋아할 뿐 아니라 여러 다사다난한 일들이 생기며 함께 웃고 또 울기도 하다 보니 벌써 덕질 7년 차에 접어들고 있네요. 뭐, 사실 그렇게 엄청난 덕후는 아닙니다. 그냥 가장 좋아하는 멤버 머리색을 보고 대충 어느 활동을 할 때인지 가늠하는 정도? 정말 엄청난 분들은 사진만 봐도 어느날짜 어떤 방송의 헤어/메이크업/코디인지 바로 아시더라구요.

아이돌을 향한 팬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주변에서 연애를 왜 안 하냐 물어보면 “덕질하느라 바쁘다”고 답하기도 하는데요, 그러면 “그거랑 그거랑 같냐”는 답이 돌아옵니다. 간혹 “너가 그런다고 걔네가 알아주냐”(솔직히 이건 시비 아닌가요)고도 합니다. 뭐, 저도 일대일의 대면관계의 사랑이 주는 소중함은 물론 아는데요. 그저 일대일이 아닌, 대면을 통한 관계쌓기가 아닌 방식으로 무언가의 사랑을 할 뿐이랍니다. 둘은 ‘다른 사랑’이고 ‘다른 경험’이라는 거죠. 한때는 “걔네가 알아주냐”, 이 말이 예전에는 뭔가 기분이 나빴는데요. 근래엔 제 덕질식 사랑의 핵심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질문을 해봤어요. 사랑이라는 건 꼭 상대방이 알아줘야 하는 걸까. 그래, 지속성을 위한 최소한의 인정이 필요하다고 하면, 알아준다는 건 뭘까. 팬들의 사랑에 대한 가수의 답변은 뭘까. 그건 아무래도 노래일 것 같습니다. 노래는 애정 담긴 편지인 거죠. 기나긴 시간을 붙어있지는 못 해도 그 안에 보이는 세심함을 발견해주는 게 팬들의 애정이겠구요. 또 질문을 해봤죠. 걔네가 ‘나를’, 그러니까 나라는 ‘한 사람’을 알아줘야 할까. 사실 덕질은 그런 걸 바라며 하기엔 악조건인 것 같거든요. 그보다는 수십 수백만명의 팬들, ‘우리’와 그들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일대일의 소유하는 관계가 아닌 다른 방식의 관계맺기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제겐 실험적인 사랑 같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공동체(?)로의 믿음이 중요한 사랑이랄까요. 그리고 또 질문을 해봤어요. 이 사랑은 영원할지. 연애를 하면서 ‘평생 사랑하자’는 등의 미래를 전제하는 말에 쉽사리 대답을 못 했어요. 그거 대답하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그런데 사실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덕질을 하면서 그 마음을 괜시리 돌아보게 되더라구요. 당장 내년에 콘서트 언제 할지 기대하는 것부터가 제 미래 계획 중 일부로 그들이 자리했음을 실감케 합니다. 영원할지는 모르지만,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사랑이겠죠. 물론 여전히 영원할지는 모릅니다. 제가 떠날 수도 있고, 그들이 떠날 수도 있고, 그들이 저를 떠나도록 강제(?)할 때도 종종 있으니까요. 근데 그건 어느 관계에서도 일어나는 일 아니겠어요. 가장 중요한 건 영원을 바라는 제 마음이겠다. 그게 사랑의 핵심이구나. 그러니 일단 좋아하고 보는 거겠죠.

가끔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내가 이렇게 각박한 세상에서 아직도 누군가를 좋아하고 응원할 수 있구나. 나라는 한 사람을 알아주지 않아도 팬 중 한 명으로서 누군가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게 되는구나. 그러니 ‘아직 세상은 살만하구나’. 퇴진 집회에서 [OO아 살기 좋은 세상 만들어줄게]라는 피켓을 마주하면서 든 생각은, 제게 ‘OO이 살기 좋은 세상’은 사실 ‘내가 마음껏 사랑하기 좋은 세상’인 거 같아요. 다른 팬들도 그렇지 않을까요? 아무쪼록 집회에서 그런 애정 담긴 피켓과 반짝이는 응원봉들을 보면, 저와 같은 덕후들의 사랑과 그 사랑이 만들고 있는 정치적인 힘(?)을 알아봐주시면 좋겠네요. 다음 집회엔 저도 응원봉을 들고 나가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