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경제위기는 결국 인권의 위기로 직결될 것이다. <인권하루소식>은 당면 경제위기를 인권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 대안을 찾아보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이 글을 싣는다<편집자주>.
현재 한국 경제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하기야 해방 이후 우리나라가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걸어온 이래로 경제위기가 아니었던 시기가 별로 없었고, 동시에 그 경제위기의 순간마다 자본축적의 새로운 조건이 형성되었던 것이 우리의 한결같은 경험이다. 물론 국가부도사태로 일컬어지는 현 상황이 과거 어느 때보다 위기의 심도가 강렬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 자본주의가 붕괴될 것이라고 예단할 수는 없다. 따라서 현 시기의 문제는 지배블록(보수정치권과 독점재벌)이 위기극복을 통해 재편하려고 하는 축적구조의 방향이 무엇이며, 이에 저항하는 노동대중의 전략적 대안이 어떠한 방향으로 설정되어야 하는가이다.
위기는 낡은 질서로부터
먼저, 현 경제위기의 근본배경부터 살펴보자. 그것은, 지난 60년대 이래의 축적구조, 즉 국가주도적·재벌중심적·노동배제적·대외의존적 축적구조가 이미 낡은 것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질서(그것의 주도세력이 자본이든 노동이든 간에)는 형성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최근 10년간의 한국 자본주의 역사는 이미 생명력이 고갈된 낡은 질서를 억지로 끌고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재벌은 독점자본으로서의 경제권력을 확립하였지만, 취약한 축적기반으로 인해 천민자본으로서의 속성을 탈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강화할 뿐이었다. 국가는 자본에 대한 절대적 권위를 상실한 지 이미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축적조건을 정비하는 총자본으로서의 기능과 관련하여서도 재벌과 끊임없이 마찰을 빚었다. 이러한 지배블록 내부의 균열은 결국 노동대중에 대한 헤게모니 상실로까지 이어졌고, 사회통합력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한편 노동대중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한국 사회의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였지만, 객관적 조건의 악화와 주체적 역량의 미성숙으로 인해 대안세력으로 결집되지는 못하였다.
소수기득권층의 자유만 확대할 뿐
결국 현재의 위기는 경제위기일 뿐만 아니라 정치위기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바로 노동관계법 날치기 전후의 상황전개이다. '참여와 협력의 새로운 노사관계 구축'을 표방하였던 국가권력(YS정권)도, '노동시장 유연화'를 획책하였던 독점재벌도, '노동악법의 개폐'를 요구하였던 노동운동세력도 모두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지 못하였고, 모든 계층계급이 정치적 패배자가 되고 말았다. 어떠한 계층계급도 사회통합의 주체로 기능할 수 없을 정도로 낡아버린 기존 질서에 대해 이제 IMF라는 외적 강제가 부과됨으로써 한국 자본주의는 새롭게 재편되게 되었다. 물론 재편의 기본방향은 IMF가 대변하는 미국의 경제질서, 즉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를 확산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자유는 결코 '만인의 자유'가 아니다. 미국의 신자유주의는 사적 소유권의 신성불가침성을 전제로 하면서, 다만 시장의 투명성을 제고함으로써 모든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사적 소유권을 가진 자, 그중에서도 아주 많이 가진 '소수 기득권층의 자유'만을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이 때의 소수 기득권층은 초국적 독점자본과 (이에 대해 새로운 종속적 파트너 관계를 구축할) 국내 독점재벌을 의미한다.
고용안정·재벌해체투쟁으로
재편은 이미 시작되었다. 우선, 재벌에 대한 IMF의 요구는 경영투명성 제고(상호 지급보증해소, 결합재무제표 작성 등)일 뿐 재벌해체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 과정에서 살아남는 재벌은 보다 집중되고 근대화된 독점자본이 될 것이다. 다른 한편, 노동대중에 대한 IMF의 요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본의 소유권 행사에 방해가 되는 노동의 권리, 즉 소유권에 기초하지 않은 권리는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노동대중에게는 굶어죽을 자유만이 남았다.
그렇다면, 노동대중의 대안은 명확한 것이다. '소유권에 의해서만 인정되는 권리(신자유주의적 자유)'라는 개념을 극복함으로써 '소유권에 기초하지 않은 권리(사회적 자유)'라는 개념을 확산시키고 제도화하는 것이다. 현재의 구체적 상황에서 이것은 다음 두가지 과제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노동대중의 생존권 확보 투쟁, 특히 정리해고제 도입 반대를 통한 고용확보 투쟁으로 제시된다. 다른 한편에서는 소수 기득권층, 특히 재벌총수의 소유권 제한을 통한 재벌해체 투쟁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구체적 실천과정을 통해 노동대중은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는 주도세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상조(한성대 경상학부, 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