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이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바로 지금 우리의 문제다. 책의 출판년도가 2002년임에도 십 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내용에 걸리는 점이 없다. 2004년 문화연구 시월에서 이 책을 처음 만난 뒤로 8년 만에 세상에 나왔지만 아직도 구태의연한 구석이 없다. 198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 쓰인 글 네댓 개를 제외하고는 대개 90년대 쓰인 점을 감안할 때 ‘동시대적’이며 ‘지구적인’ 쟁점을 다루는 데 손색이 없는 필자들의 내공이 마냥 부러울 뿐이다. (국내에서 이런 페미니스트들을 만나려면 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둘째, 21세기 여성해방 기획과 사회변혁론을 만날 수 있다. 서른다섯 명의 페미니스트들은 성과 계급, 인종과 민족을 가로질러 여성억압 이론을 논쟁적으로 제시하고 해방의 정치적 전략을 제안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섹슈얼리티와 재생산, 가족, 노동에서조차 논쟁점을 제기하는 데서 나아가 공공성과 사회복지, 정치와 사회변혁, 생태와 지식의 문제에 이르러서는 아예 새로운 접근을 내놓는 이들의 초대에 기꺼운 마음으로 응하고 싶어진다.
셋째, 페미니즘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수 있다. 페미니즘은 남성(권력)의 눈이 아닌 여성(타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기에 피억압자의 인식론이다. 때로 그것이 오염되어(주류페미니즘과 국가페미니즘과 같이 계급과 인종을 도외시하며 정치적으로도 올바르지 않은 페미니즘들의 ‘신자유주의 통치’ 도구화) 페미니즘에 왼쪽 날개(이 책의 제목이 ‘페미니즘’의 ‘왼쪽 날개’라고 달린 이유!)를 달아 주어야 하는 처지에 놓였지만, 페미니즘의 본령은 ‘보편적 인식론’이자 ‘사회변혁론’이라는 데 있다.
넷째, 글쓰기에 대한 성찰은 이 책의 일석이조 효과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우리가 흔히 ‘여성적 글쓰기’라고 말하는 것의 다양성을 들여다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면 안 되는 것, 그것을 말하는 고통과 그렇기에 느낄 수 있는 진정성, 경험과 사례와 분석이 풍부한 페미니즘 이론으로 녹여지고 재구성되는 글쓰기. 페미니스트라면 한번쯤 고민해봤을 문제일 것이다. 나는 어떤 말과 글로 나를 드러내며 소통할 것인가?
이 척박한 땅에서 13회째 퀴어퍼레이드를 이어가고 있는 단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한국의 퀴어들은 갈채 받아 마땅하다. 영화 ‘종로의 기적’(2010)과 ‘3×FTM’(2008)을 개봉관에서 볼 수 있던 경험 자체가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동성애자 해방이 사실은 전체적이고 전 세계적인 전망을 표현했다는 사실, 그리고 섹슈얼리티 영역의 억압을 다른 영역 특히 젠더뿐 아니라 인종 및 계급 영역의 억압과도 연결해 분석했다는 사실을 유념하면 좋겠다. 동성애자 해방의 전망은 결코 ‘협소’하지 않았다.어느 활동가의 말을 빌자면, 이 운동이 추구한 미래상은 페미니즘보다 더 전면적이고 죽음 자체보다 더 무시무시한 혁명이었다.”(110쪽) 노동운동의 위기에서 허우적대는 노동자운동이, 정체성의 정치에 발을 꽁꽁 묶인 여성운동이 반면교사해야 할 것은 동성애자운동이다. 운동의 전망과 해방의 기획이 자기 안에만 머무를 때 그것은 이미 운동이 아니고 해방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 페미니즘 이론에서 만들어 낸 모든 개념 가운데 가부장제야말로 아마 가장 남용되고 어떤 면에서는 가장 이론화되지 않은 개념”이라는 생각을 평소 가지고 있던 나로서는 데니즈 칸디요티의 「가부장제와 교섭하기」의 첫 구절부터 가슴에 꽂혔다. 비교연구의 중요성과 문화, 역사, 사회적 접근의 유용성을 보여준 데니즈 칸디요티의 글은 ‘가부장적 교섭patriarchal bargain’이라는 신선한 용어를 선보이는 데 그치지 않고, “젠더 구분 자체를 문제시하는(그리고 그것을 담론 폭력의 기원적 행동으로 다루는) 분석들이 성별화된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특정한 사회관계나 제도적 틀에 대한 깊은 이해를 자동적으로 진전시켜 주지는 않는다. 남성 지배나 가부장제 같은 개념을 포기하고 그 대신 젠더를 선호하는 데 따르는 난점은 여기서 비롯한다. 사회관계 이론에 바탕을 두고 젠더를 논의하지 않을 때는 더욱 그렇다”(253쪽)는 입장을 견지한다. 이러한 지적은 페미니즘 이론이 젠더 이론이 되어버린 주객전도한 우리 현실을 새삼 돌아보게 만든다.
인도 나르사푸르 레이스 직조공 여성들, 미국 실리콘밸리 노동자들, 한국 반도체 전자산업 노동자들의 경우는 하나같이 “노동 범주를 자연화하는 유연성, 임시성, 비가시성, 가정성 등의 관념이 제3세계 여성들을 적절하고 저렴한 노동력으로 구성하는 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모든 관념들은 젠더, 인종, 빈곤 등에 관한 고정관념에 의존하며, 이런 고정관념은 다시 제3세계 여성들을 현대의 전 지구적 세계에서 노동자로 특징짓는다”(285쪽)는 사실에 부합된다. 『경계없는 페미니즘』(2005)을 통해 우리와 친숙한 찬드라 탈파드 모한티는 제3세계 여성 재현을 둘러싼 서구(백인)페미니즘의 담론적 식민주의를 비판해왔다. 모한티, 스피박, 그리고 해러웨이가 주목한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의 여성노동에 대한 내밀하고도 지속적인 천착이 왜 우리 학계에서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까? 여성이 처한 복합적인 현실을 미세한 현미경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서발턴(subaltern, 하위주체) 연구자들의 등장이 아쉽다.
복지 논쟁에 휩싸인 한국에서 미미 아브라모비츠의 「여전히 공격받는 중: 여성과 복지 개혁」은 실용적인 시사점을 던져준다. “복지국가는 언제나 정치적 투쟁의 무대였다”든가 “복지 개혁은 누구보다도 공적 부조에 의존해 살아가는 저소득층 여성들에게 가장 큰 해를 끼친다. 그러나 또한 번듯한 임금을 받고,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며, 학대 관계에서 벗어나고, 부모 모델two-parent model에 들어맞지 않는 가족을 이루며 살아갈 모든 여성의 권리도 위협한다. 복지 개혁의 이런 위협은 양육 지원, 재생산 권리, 남성의 폭력을 벗어난 안전, 경제적 독립 등을 약화함으로써 이루어진다”(372쪽)는 점은 보편적/선택적 복지 논쟁 이전에 전제되어야할 것이 무엇인가를 사고하게 해준다. 복지가 노동, 결혼, 임신, 육아와 연계시킨 여성들의 삶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서는 안 된다는 점 말이다.
정치와 사회변혁에 관한 메리 E. 혹스워스의 「민주화: 공공영역의 성별화된 탈구에 대한 고찰」과 조해너 브레너의 「횡단, 위치, 자본주의 계급관계: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본 횡단성」은 오늘날 한국 정치의 실상을 비추는 거울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통합진보당 사태를 성찰하고 사회주의 정치의 앞날을 내다보게 된다. 관료화되고 실리적인 노동조합business union에 대한 비판도 우리 현실과 다르지 않다. “재생산의 자유라든가 경제정의 같은 ‘합의를 모으기 힘든 쟁점’은 당의 의제에서 제거할 필요가 있다”거나 “여성의 ‘우월한 윤리 기준’에 대한 칭찬은 여성을 주변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권이라는 헤게모니적 언어가 허용 가능한 사회변혁의 한계로 작용하는 현실”에서 “특정한 자유주의적인 시민사회 개념의 제도화, 비정부기구를 통한 여성의 시민사회 통합, 민주화의 중심적 요소로서 이익 타협주의 정당의 장려 등은 흔히 진보적인 발전으로 묘사되지만, 이런 것 역시 남성들에게 진보로 여겨지는 구조가 여성들에게는 대단히 다른 결과를 낳는 또 다른 사례일 수 있다.”(508~9쪽) 어떤가? ‘어쩜 우리랑 똑같네, 똑같아’를 연발하게 되지 않나?
자연, 사회, 지식에 관한 글들은 특히 더 논쟁적이다. 맑스의 접근법이 생물학 분류 방법론과 일치한다는 낸시 홈스트롬의 「여성의 본성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이나 최근 환경ㆍ생태운동의 주류들인 사회생태론과 근본생태론을 에코페미니즘 관점에서 다각도로 비판하는 밸 플럼우드의 「생태정치론 논쟁과 자연의 정치학」은 건너뛰어서는 안 될 즐거움이다. 줄리 시가 소개한 환경정의의 확장을 위한 아시아계 미국인 페미니즘 운동에서 한국계 전자노동자의 인터뷰를 접하는 것은 반가움이면서 동시에 씁쓸함이다. 낸시 하트삭은 「페미니스트 입장론을 다시 본다」에서 (멕시코와 텍사스의 경계에 사는 치카나의 경험을 살려 글을 썼던) 글로리아 안잘두아의 말을 빌려 “두 현실 속에서 살면서 접촉면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경험뿐만 아니라 표면적인 현상에서 심층적인 현실의 의미를 보는 ‘능력’”을 지적하는데, “가장 많이 닦달당하는 이들이 가장 강한 능력을 갖게 된다”며, “여성, 온갖 인종의 동성애자, 유색인, 추방당한 자, 박해받는 자, 주변으로 밀려난 자, 외국인 등이 그들”이며 “이런 능력은 두 세계 사이에 낀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획득한 생존 전술이지만 우리 모두에게도 잠재해 있다”고 말한다.(582~3쪽) 그렇다. 그러한 능력은 우리 모두에게 잠재해 있다!
지금 여기 우리에게 필요한 것
‘가부장체제’, 이 책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그리고 인종주의가 구조적으로 얽혀 있는 동시에 계급, 인종, 젠더가 서로 교직되어 있어 어느 하나로 환원될 수 없으며, 그렇기에 우리가 ‘억압의 복수성’이 쳐놓은 그물망에 정치적 연합으로 맞서고 무지개 운동의 일부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나아가 브레너가 강조하는 ‘횡단성’은 “노동계급 여성들이 인종, 민족, 섹슈얼리티의 구분선을 가로질러 조직화되어야 할 것”이라며 자본주의에서 다양하게 교차되는 제도화된 권력관계의 상호관계를 분석하는 일에 매진해야 함을 몸소 보여준다. 가부장체제는 이제 페미니스트 이론가와 활동가들이 사회과학과 활동가론으로 정립해야 할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맥신 몰리뉴가 말한 ‘실용적인 젠더 이해’는 모한티의 ‘위치성’과 낸시 하트삭과 해러웨이의 ‘상황적 지식situated knowledge’을 떠올리게 한다. 실라 로보섬은 미국의 흑인민권운동을 TV에서 보고 블랙파워에 관한 글을 읽으며 “단지 형식적인 권리만이 아니라 문화적 정체성과 상징적 공간에 대한 접근권, 자신의 자아를 규정할 수 있는 힘 등의 쟁점을 제기하는 투쟁에 관해 알게 되었”으며, “자신들이 어떻게 간주되고 재현되는지에 도전”했다고 했다.(435쪽)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40년 전의 그들과 다르지 않다. 여성들은 저마다 특정한 위치에 놓인 ‘맥락적’ 지식을 갖는다. 구체적인 조건에서 변화의 힘을 가지고 권력관계를 조망한다. 나는 어떠한 계급에 속해 있으며 무슨 인종이며 장애를 가지고 있는가? 나의 성정체성은 무엇이고 성적취향은 무엇인가? 나는 어떠한 정치적 지향을 갖고자 하는가? 나는 나의 ‘위치성’을 확인하며 나의 조건에 맞게 ‘상황적 지식’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필수품)은 이런 게 아닐까? 사실 이 책의 제목인 ‘왼쪽 날개’나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낚시에 가깝다. ‘억압의 복수성’과 ‘횡단성’, 그리고 ‘상황적 지식’이야말로 이 책의 키워드다.
같이 읽을 만한 책들
열심히 쓰다 보니 서평의 오지랖이 넓혀졌다. 더불어 소개하는 책들은 같이 읽어두면 두고두고 좋을 책들이다. 1984년 해러웨이의 그 유명한 ‘사이보그 선언문’이 실린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는 하이테크의 젠더화된 상상력 이면, 직접회로 속의 여성들을 통해 ‘가사경제’의 착취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노동이 여성화된다는 것은 지극히 취약해질 뿐”이라는 지극히 건조한 해러웨이의 말은 호러물을 보는 것 마냥 섬뜩하기조차 하다. 이 책과 모한티, 해러웨이의 책과 함께 읽을 때 가장 좋은 백그라운드(배경설명)가 되는 게 『Challenging The Chip-세계 전자산업의 노동권과 환경정의』다. 유수한 탈식민페미니스들의 실증사례 분석이 되고 있는 산업이라면 단연 전자산업이다. 이른바 ‘섬세한 손가락’을 선호하는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15~18세 제3세계 소녀들은 티끌만도 못한 생명으로 낙인찍혔다. 전 세계 반도체 전자산업의 충격적인 실태가 이 한 권에 다 들어 있다. 로보섬의 『아름다운 외출』과 고정갑희의 『성이론』은 덤이다. 이 책이 출간된 후 딱 한 달 만에 나온 『아름다운 외출』은 그동안 로보섬의 책을 학수고대했던 많은 이들에게 청량감을 준다. 엘리트주의와는 담을 쌓고 공부하며 활동하는 그녀의 깊이 있는 아우라를 느끼게 해준다. 『성이론』은 고정갑희 선생이 세계적인 이론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충분히 자아낸 책이다. 성관계, 성노동, 성정치로 구조화된 성이론화를 시도하는 이 책은 20년 넘게 성적 담론을 쥐고 있던 선생의 중간결산이 아닌가 싶다. 이들 저자들의 뜨거운 가슴과 열정적인 연구와 글쓰기에 더 많은 이들이 동참하기 바란다.
덧붙임
이황현아 님은 붉은목소리(http://go.jinbo.net/designfemi)에 함께 합니다. 붉은몫소리는 몫 없는 사람들과 함께 목소리를 내며 새로운 페미니스트 정치를 만들어 가고, 착취와 억압, 차별과 폭력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소통과 연대의 길을 찾습니다. (* 이 서평은 ‘99% 노동자민중의 언론 뉴스셀’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