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어디에도 없는 성평등’
‘여성 주권자가 말한다, 2024 총선에 없는 □’
22대 총선을 앞두고 ‘여성’ 혹은 ‘성평등’이 실종됐다는 진단과 토로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성차별·성폭력으로 얼룩진 후보자 공천 과정을 보며 분노와 회의감에 빠지지 않기란 쉽지 않다. 지난 2년은 윤석열 정부가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상징적인 일곱 글자로 성평등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무력화시켜온 시기다. 국민의힘은 이번 총선에서도 ‘인구부 신설’을 가장 앞세워 또다시 여성가족부 폐지를 예고했지만, 이에 맞서 성평등 가치를 전면화하거나 여성 대중을 결집시키려는 전략 또한 잘 보이지 않는다. 한국사회를 성평등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비전이 아니라 ‘젠더 갈등’ 구도를 격화시키면서 젠더 이슈를 동원했던 지난 선거들의 연장선에서, 이제는 ‘젠더 배제’ 혹은 ‘젠더 삭제’가 거대 양당의 정치 기획이 되고 있다.
어떤 정치가 실패하고 있나
최근 발표된 거대 양당의 4.10 총선 10대 공약의 핵심은 저출생과 기후위기 대응으로 수렴된다. 특히 거대 양당의 10대 공약 모두에 성차별·성평등 단어는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 대신, 그 자리를 ‘저출생’이 차지했다. 결혼·임신·출산이라는 성별화된 생애경로로 회귀한, 가족과 개인에게 부채로 책임을 전가하는 주택·금융 중심의 정책들이 핵심이다. 여성의 경력단절 방지나 남성육아휴직 강화, 일-가족 행복은 성평등 제고가 아니라 두 보수 정당의 인구 통치를 위한 가족기능 강화 전략일 뿐이다. 바로 지금 성평등 정치의 삭제는 한국사회 반(反)페미니즘 문법이 전통적인 ‘보수 대 진보’라는 정치 프레임을 벗어나서 작동하고 있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저출생과 인구절벽 현상으로 대표되는 현상은 결국 ‘사회를 어떻게 재생산할 것인가’의 문제다. 이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여성정책이 아니라 노동시장, 돌봄 공백, 젠더 및 가족변동을 교차해 성평등을 구성 원리로 삼는 포괄적인 정치의 필요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하지만 거대 양당의 ‘성평등 없는’ 저출생 대책은 모두 ‘페미니즘의 목표는 시효를 만료했다’(여성은 더 이상 차별받는 소수자가 아니다)는 포스트-페미니즘에 편승하면서,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반페미니즘을 선동 또는 방치하면서 대통합의 길을 걷고 있다. 문제는 보수와 반보수 구도 아래 불평등에 저항하는 대중의 요구를 진압해 온 것이 비단 어제오늘만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난 수십 년 간 노동시장의 여성화를 추동하면서 자본주의 체제의 기반인 가족 유지와 여성노동력 육성으로 성평등의 이상을 대체해 온 것이 거대 양당의 정치세력이다.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양성평등’과 ‘일-가족 양립’ 정책은 여성 대중의 사회적 요구를 보편화한 운동의 성과다. 하지만 동시에 ‘양성평등’과 ‘일-가족 양립’은 언제나 도시 거주, 고소득·중산층, 이성애 핵가족, 내국인 위치의 여성만 도달가능한 이상이라는 점에서,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하에 이루어진 여성의 재가족화·계층화·양극화를 가리는 역할을 해 왔다.
지금 시대에 어떤 성평등 정치가 필요한지는 22대 총선 전에 제기된 성평등 젠더정치의 방향을 살펴봐도 알 수 있다. 이는 21대와 비교해도 뚜렷한 변화다. 지난 해 주요 여성단체들이 연구·발표한 ‘지속가능한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총선 정책의 전면에는 ‘돌봄·기후정의 실현’이 등장했다. 사회구성원 모두를 돌봄자-노동자-시민으로 재구성하는 돌봄생태사회를 핵심으로 제시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자본주의 체제가 가속화하고 있는 기후위기와 성차별은 떨어질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있다. 노동시간 단축은 여성정책과는 무관한 노동정책으로, 돌봄권은 남성과 무관하게 여성에게만 절실한 권리로, 기후위기는 불평등이 아니라 기술대응의 영역으로, 각 영역과 의제를 아무 연관이 없는 것처럼 분리시키고 구획해온 것이 지금의 위기를 불러온 정치의 단면이다. 성평등 정치가 ‘여성정책’으로도 ‘인구정책’으로 대체될 수 없는 이유, 여성정치인 개인에게 할당된 역할로 국한될 수 없는 이유는 성평등 정치가 이 시대의 사회구조적인 불평등과 모순을 드러내고 또 돌파하려는 기획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적 변동 속에서 역사적 경로를 변화시킬 역량도, 노동·가족·주거·돌봄 등 삶의 유지에 필수적인 권리의 체계적인 박탈로 지목된 원인를 해결할 의지도 없는 보수 양당 구도 하에서 성평등 정치는 철저하게 교착상태에 머물러 있다.
‘여성정치세력화’를 통한 성평등 정치
한국사회에서 성평등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이자 성평등 정치의 실현을 위한 경로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것이 바로 정치 영역에서의 ‘여성대표성’이다. 의회 내 여성정치인, 정부 및 지자체 구성에서 페모크라트(femocrats)의 비율은 그 자체로 성평등의 척도다. 또한 엘리트 권위주의 남성 중심의 정치라는 기존의 정치 틀과 정치문화를 바꾸기 위한 여성주의 기획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등장한 과제가 바로 ‘여성정치세력화’다.
87년 민주화운동 이후 민중운동은 이른바 노동자정치세력화를 이념으로 한 민주노조·진보정당운동과 시민운동 흐름으로 분화된 반면, 민주화운동의 일부로서 스스로를 진보적-변혁적 여성운동으로 정체화 했던 여성운동은 ‘여성대중’을 기반으로 한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흔히 여성정치세력화를 표현해왔던 ‘따로 또 같이’는 기존 민중·시민운동과 함께 하면서도 ‘여성’의 입장과 목소리를 가시화하는 독자적 정치를 구축할 필요성을 드러내는 말이다. 또한 ‘영향의 정치와 참여의 정치’라는 이중전략은 제도정치 밖에서 여성운동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동시에 제도정치 내 여성의 직접 참여를 촉진·확대할 필요성을 드러낸다. 사실 이러한 여성운동의 독자적 경로는 이른바 진보운동 내에서도 성별화된 시민권, 이에 기반한 남성 주도의 정치에 한계에 놓인 여성운동의 시대적 조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성’이라는 독자성과 참여 정치의 성과로 꼽히는 대표적인 사례는 2005년 호주제 폐지와 여러 정치제도 개혁일 것이다.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여성운동의 주도와 시민사회의 연대, 원내 여성의원들의 초당적 협력이 주요한 동력으로 작용한 결과 2005년 호주제는 결국 폐지되었다. 그리고 비례대표제, 공천 시 여성할당제, 공직 후보자 여성 추천 보조금 등 정치제도의 변화는 현재 정치구조에서 여성의 과소대표성을 보완하고 의회 내 다양성을 진전시켜 왔다. 현재도 ‘남성의 얼굴을 한’ 정치를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운동의 토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여성과 사회적 소수자를 위한 ‘여성정책’이 정권이나 의회의 진보·개혁성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더 많은 여성정치인, 더 높은 여성대표성을 요구하고 여성정치인들의 원내 진입을 지지하는 활동은 여성정책에 주도적인 여성정치인들의 입법 활동을 통해 그 사회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 여성의 정치대표성의 의미를 단순히 생물학적 여성의 숫자로만 보는 시각은 없다. 하지만 ‘여성정치세력화’라는 과제가 끊임없이 논쟁이 되어 왔다. 이는 여성정치인이 여성의 관점과 요구를 더 잘 대표하고 실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허황된 것이어서가 아니라, ‘어떤 여성주의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세력화인지가 흐릿해져온 과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추진했던 민주주의와 인권의 제도화 속에서 여성운동은 여성부 신설, 여성·가족·폭력 법제도 확립을 통해 여러 진전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이 시기는 동시에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전환이 폭력적으로 확립된 때로, 여러 사회운동들이 신자유주의 질서를 보완하는 제도화 경로에 포섭된 시기이기도 하다. 페미니즘 정치를 진보정치의 핵심 원리로 갱신하지 못한 노동자세력화 정치가, 다른 사회경제적 정의와 정치적 의제로부터 ‘여성정책’을 분할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도전해오지 못한 여성주의 정치가 신자유주의 질서가 가져올 위기를 함께 맞서기보다 각자의 방식으로 분투했던 흐름이 긴 시간 이어졌다. 여성정치세력화는 사회정의나 변혁의 정치로서 운동의 영향력을 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위한 전략이라기보다, 제도정치 내에서 개별 정치인의 진입과 행보를 통해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시도에 집중됐다. 특히 보수적인 당파성의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반보수 전선에 휩쓸린 채 여성정치인은 ‘여성’이라는 상징으로 포섭되고 여성정책은 권리의 할당으로 부차화되는 경향도 짙어질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여성주의 정치의 역동과 가능성은 어떻게 침식되어 왔나
2015년을 전후로 한 ‘페미니즘 리부트’가 성평등 민주주의와 페미니즘 정치에서도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동안 여성정치세력화가 ‘참여의 정치’로 대표되고 제도정치 내 여성의 과소대표성에 주목해왔다면, 특히 리부트 시기 등장한 여성들에게 ‘페미니즘’과 ‘정치’는 분리될 수도, 하나의 영역에 국한될 수도 없는 것이었다. 2017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의 ‘페미니스트 대통령’ 선언은 민주당의 이념이라기보다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운동과 2016년 강담역 여성혐오 살해 사건 대응, 박근혜 퇴진 국면에서 광장의 여성혐오에 맞서는 페미니스트 정치를 외면할 수 없었던 시대적 투쟁의 산물이기도 했다. 2018년의 미투 운동의 폭발, 불법촬영과 편파수사를 규탄했던 혜화역 시위, N번방으로 드러난 성착취, 안희정·오거돈·박원순으로 이어진 위력 성폭력 사건은 진보정당 내 여성정치세력화, 페미니즘 정당으로서의 이념 가시화, 새로운 여성정당 창당 등의 흐름이 본격화된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부트’를 통해 급격하게 가시화되었던 성평등 요구는 왜 다시금 여성들에게 ‘침체기’로 여겨지고, 페미니즘 배제와 삭제라는 현재의 반페미니즘 연합으로 나타나고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현상의 원인이 선거라는 정치적 영토에 여성들이 충분히 도전하지 않아서도, 제도정치를 둘러싼 법과 제도의 한계 때문만도 아니라는 점이다.
박원순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과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성평등에 대한 자기혁신과 새로운 정치적 전망 없는 정치, 보수 대 진보, 보수 대 반보수라는 거대 양당의 프레임의 한계 속에서 여성정치세력화의 열망 또한 쉽게 침식될 수밖에 없음을 드러낸 결정적인 계기였다. ‘피해자’과 ‘피해호소인’ 사이의 논쟁, 피해자에게 법적·사회적 진실에 대한 권리와 또 다른 사회적 위력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침해된 사건, 당헌을 개정하면서까지 ‘여성’을 내세우며 보궐선거에 출마했지만 당 내외부의 2차 가해를 제지하지도, 기존의 노동·젠더 체계를 넘어서겠다는 대안도 제시하지 못한 더불어민주당은 반보수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또한 동시에 사회학자 김현준의 지적처럼 양당 구도에서 진보를 자처하는 민주당이 “민주국가를 위한 ‘우리의 블록’이 아니라 ‘저들의 블록’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반보수 정치의 한계를 드러냈다. 20대 대선에서 여성대중을 결집시키며 0.73%라는 최저 득표율을 만들었지만 민주당에서 고립된 것은 여성정치인 박지현 개인의 역량 문제일까. ‘권위주의적 보수주의 정당과 싸우는 정당’이라는 기표를 성평등 정치로 갱신하기를 거부한 반보수 정치는 어떻게 생명을 연장하는지, 왜 우리는 이러한 정치만이 답이라고 여기게 됐는지를 더 많이 질문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이 독점한 ‘진보’의 위선을 깨야 한다는 이유로 국힘 행을 결정한 여성정치인 신지예는 진보에서 ‘변절’했기 때문에 문제인가. 국민의힘은 젠더 폭력을 성평등이 아니라 보수화된 엄벌주의 치안 담론으로 대체하려는 정치세력이다. ‘페미니즘이 진보의 전유물도 아니지 않나’라는 그의 물음은 진보와 개혁 정치를 두고 상호압박 하지 않는 거대 양당의 반페미니즘 담합에서 페미니즘 정치의 이념 또한 쉽게 탈정치화된 다양성으로 수렴될 수 있는 현실을 보여줄 뿐이다.
지금 여기, 페미니즘 정치 세력화가 절실한 때
지금의 선거 국면을 보고 있자면 성평등 정치의 의미는 정당의 성평등 정책 혹은 공약 여부로 상상되고, 세력화의 의미가 정치적 의사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정치세력 사이의 협상 가능성이 되어버린 듯하다. 선거 때마다 젠더에 대한 왜곡, 평등에 대한 폄훼, 페미니즘에 대한 낙인찍기가 거세질수록 보수 집권만은 막아야 한다는 반보수 진영 논리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위기를 넘어설 ‘페미니즘 정치’는 무엇인지, 누구와 함께 이 시기를 넘어설지에 대한 고민은 계속 앙상해져왔다.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페미니즘 정치세력화는 무엇이어야 할지 깊은 성찰과 비판, 토론이 필요한 시기다. 하지만 여성정치, 노동자정치, 기후정치,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전망을 이룰 수 있는 세력화가 다 따로 따로 떨어져있지 않다는 사실을 일상에서 감각하는 이들은 미래에 있지 않다. 자신들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강요하는 보수 양당과 그에 대한 막연한 신뢰가 우리 삶의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선택한 이들 또한 멀리 있지 않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위기는 ‘사회를 어떻게 재생산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더 외면할 수 없다. 우리가 바라는 지속가능한 성평등 사회 전망이 ‘모두를 돌봄자-노동자-시민으로 재구성하는 돌봄생태사회’라는 것 또한 분명하다. 이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도전이 ‘체제전환 페미니즘’일 거라고 생각한다. 자연과 인간 모두를 이윤축적의 동력으로 삼으며 기후위기와 불평등을 가속화하는 체제, 생산과 재생산을 가르며 무엇이 가치 있는 노동이고 어떤 인간이 자격이 있는지를 위계화하는 바로 그 자본주의 체제를 변화시키려는 투쟁 없이 페미니즘 정치는 불가능하다. 그러한 사회를 함께 만들어가고자 하는 이들이 분할과 고립의 정치를 넘어 서로를 정치적 주체로 세우려는 시도로 만날 때, 페미니즘 정치세력화의 다른 길 또한 찾아갈 수 있다. 이 과제가 여성 혹은 페미니스트만의 것이 아니라 성평등 사회를 바라는 모든 이들의 과제라는 인식이 그 길의 출발선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