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5일 ‘성평등 정치 전략 논의를 위한 운동사회 토론회’가 열렸다. 정치 전략을 논의해보자는 거대한 제목의 토론회는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이하 ‘차제연’) 평등여지도팀에서 기획이었다. 평등여지도 팀은 물론 발제와 토론을 맡아주신 분들도 모두 이 ‘정치 전략’이라는 타이틀에 대한 부담을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기꺼이 각자 역할과 요청을 맡아준 이유는 전략 그 자체보다는 ‘성평등 정치’에 대한 필요성에 공감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대통령이 나서서 ‘구조적 성차별이 없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혐오와 폭력은 문제로 인식되기보다 일상을 파고들며 무감해지길 강요한다. 이번 토론회는 이런 조건 속에서 어떻게 성평등한 사회로 한발 더 나아가게 만들 것인지, 이를 위해 정치적 힘을 모아내는 방법은 무엇일지 함께 궁리해보자는 차제연의 말 건네기였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오전부터 저녁 6시까지 진행된 종일 일정에도 불구하고 40여 명이 참석하여 함께 머리를 맞대고 성평등 정치의 시작을 톺아보는 자리가 진행될 수 있었다.
성평등 정치의 시작을 고민하며
1부에서는 성평등 정치의 필요성을 중심으로 토론을 나누었다. 차별금지법제정 운동이 제도 만들기만이 목적이 아니라 평등을 지향하는 움직임을 조직하는 운동이 되기 위해선 평등한 사회의 고민과 내용을 제안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지금 한국 사회가 평등으로 나아가기 위한 전선의 중심에 성과 섹슈얼리티를 놓여있다. 표면적으로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가 확장되고, 여성의 경제적 권리가 확보되고, 소수자의 존재가 조금 더 가시적으로 드러낼 수 있게 될지언정 이들의 성적 실천, 다양한 몸, 폭력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권리 등이 없다면 권리는 확장되지 못한다. 성평등을 부정하는 이 사회에서 평등이 확장될 수 없는 이유다. 바로 이 지점에서 차제연은 성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권리를 성평등 정치의 방향으로 기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고민을 나누고자 했다. 이에 교육, 노동의 주체들의 응답과 함께 플로어의 참여자들까지 함께 그 필요성과 각자의 고민을 나누고, 확인하는 자리를 가졌다.
성평등 정치의 방향과 필요성을 확인한 이후 2부에서는 성평등 정치의 실천을 위해 구체적인 현장에서 어떤 권리들이 경합하며 움직임을 모색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비동의 강간죄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비/동의를 이분법으로 해석하지 않는 사회의 역량을 어떻게 키워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하는 토론부터 시작했다. 이어 미디어, 학교, 도서관 등 공공의 공간에서 섹슈얼리티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살피며 양육자의 관점에서 고민을 나누었다. 또한 아동/청소년의 성적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가 비단 성적권리만이 아니라 보호주의와 나이주의의 한계를 함께 마주하는 현실을 진단하며 이 역시 같이 뛰어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남성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성교육의 현장의 어려움을 함께 확인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인권의 권리 목록에서 ‘도전받는 권리로서’ 성적 권리가 차별적인 이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살폈다. 나아가 체제의 정상성과 생산성을 뛰어넘기 위한 성적 권리의 내용을 담은 대항말하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토론까지 이어졌다. 2부는 각기 다른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성평등 정치의 실천에 대한 고민을 꺼내놓는 자리인 만큼 토론이 쉽지는 않았다. 서로 어디에서 만나고 연결되어 있는지 찾고, 어떤 관점의 차이를 두고 토론하며 고민을 교차시켜 갈 것인지 확인하기에 2시간 토론은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이번 자리를 시작으로 성평등 정치의 교차 지점을 확인하고 더 많은 고민의 교류 속에서 성평등 정치의 앞으로가 더 기대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는 자리였음은 분명했다.
마지막 3부는 ‘그래서 앞으로 어떤 정치적 기획과 전략으로 함께해나갈 것인지’를 궁리하는 자리를 가졌다. 성평등도서 대응을 시작으로 지역 현장 활동은 물론, 공동의 기획사업과 정책 활동 등을 제안했다. 이에 지역 단위로 공주책읽는여성행동에서 참여해주셨다. 공주에서 성평등 검열 조례 개악 대응의 과정을 나누어 주시면서 성평등 정치는 같이 의논할 대상이 없다시피 한 현실의 어려움을 나누어주셨다. 하지만 동시에 지역의 작은 활동이 힘없는 활동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연대의 경험을 쌓고 대응력을 키우는 과정이 될 수 있었던 경험도 함께 이야기해 주셨다. 또한 무지개행동에서는 성소수자 운동에서 지역이라는 키워드의 취약함에 대해 솔직하게 나누면서도 동시에 분명 연결의 욕구와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만남의 장이 열리기를 기대하는 목소리를 보태주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에서는 퇴행적인 정치의 모습을 꾸준히 살피면서 성평등이 ‘여성만의 의제’로 여기지 않고 사회 전체의 변화와 연결된 핵심적인 의제로서 발견해내는 것의 중요함을 강조했다.
성평등 정치의 계급을 구성할 수 있을까
오전부터 저녁까지 종일 토론을 진행하면서 느낀 점은 이 토론회를 함께 준비한 나의 어려움이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사실 올해 처음으로 차별금지법제정연대에 결합해 갑작스레 토론회의 발표까지 맡게 되면서 발제문을 쓰는 일이 어려웠다. 하지만 이는 그저 새로운 일이라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성평등 정치라는 것을 차제연의 방식으로 새롭게 재구성해보자는 제안이면서 동시에, 이를 선보이는 기획이었기 때문에 누구라도 쉽지 않은 발표였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한국 사회의 성평등 정치를 반차별 운동의 맥락에서 재구성해보자는 이야기는 토론회에서 이진희 님의 언급처럼 양성평등 no, 성평등 yes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어야 했다. 성평등의 내용에 성적권리, 섹슈얼리티를 포함시키는 정치의 필요성에 대해 동료들에게 묻고 그 지반을 확대해나가자는 이야기를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가 핵심이었다. 보수세력이 말하는 양성평등에는 반대한다고 말하지만, 우리의 정치기획이 소수자 정체성의 정치인을 제도권 정치로 진입시키는 것만으로는 현재 정치 지형에서 평등을 담보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평등을 향해 가기 위해 그간 현실 정치에서 누락시켜온 성적 권리와 섹슈얼리티를 기입하기 위한 우리의 고민과 담론이 어디서 만나왔고, 또 어긋나왔는지를 확인해보자는 제안은 반페미니즘 정치를 자행하는 이들에 대한 반대를 외치는 이야기보다는 더 깊은 차원의 고민이 수반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맥락을 생각하면서 개인적으로는 성평등 정치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문득 계급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됐다. 이번 토론회는 각자의 운동의 맥락과 역사를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성평등 정치를 중심으로 함께 도모하고 싶은, 성평등한 사회의 바탕으로 노동, 교육, 섹슈얼리티, 성적권리, 정체성 등의 다양한 맥락이 배제되지 않는 총체적 변화를 도모하고 싶은 그런 마음으로 모인 사람들이 교차하고, 어긋나는 자리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총체적 변화를 도모하고 싶은 마음에 걸맞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고리타분하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성/평등 정치 실현을 위한 계급’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느껴진 것이다. 다만 그 계급은 경제적 이해만을 떠올린 것은 아니었다. 성/평등이 해방적 실천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모두의 삶과 연관되는 소위 ‘먹고 사는 문제’, ‘죽고 사는 문제’와 떨어지지 않는지를 설득할 수 있는 계급을 고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분명, 우리가 마주하는 차별적인 사회에서 젠더, 섹슈얼리티는 노동, 빈곤의 문제와 떨어지지 않는 사회적 조건을 형성한다. 하지만 지금의 정치는 허구적인 성별 갈등을 조장하거나, 소수자를 정치의 장에서 아예 배제하며 이 삶의 총체적인 조건을 가리고 인정 투쟁의 영역으로 그 의미를 축소시켜왔다. 이 가림막을 해체하고 성적 권리와 섹슈얼리티가 놓여있는 현실이 노동과 빈곤을 포함한 삶의 총체가 다르지 않음을, 그래서 성평등 정치가 체제를 바꾸는 계급적 고민을 연결해보는 일도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고민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종일의 토론회였지만 한 번의 자리로 모든 것을 충분히 소화하며 다음을 기약하기 쉽지 않은 자리였다. 단번에 정치적 전망이 제시할 수 있는 것도, 명확한 방향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갈 길은 멀게 느껴진다. 하지만 평등여지도팀에서 지역을 무대로 성평등 정치를 기획해보자는 제안은 결코 작기만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지역의 아동-청소년, 여성, 소수자 등이 함께 정치적 기획을 통해 교류하고 만나는 과정은 그저 정치적 올바름의 연대가 아니라 성평등 정치의 계급을 함께 구성하는 관계로 모이고 만날 수 있는 계기를 찾는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조금 헤매고 서툴게 움직이더라도 함께 고민하는 동료를 더 많이 만나는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을 기대하며 조금 더 몸을 움직여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