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평등과 연대로! 인권운동더하기>(이하 인권운동더하기)가 출범하며 첫 번째로 벌인 사업은 ‘광장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문재인 정권 출범, 인권운동의 전망과 과제’라는 이름의 토론회였다. 이후 7월에는 ‘인권과 존엄이 기본이 되는 나라를 위한 새 정부 인권과제 제안’을 모아내 발표했고, 9월에는 ‘인권운동,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 -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 한걸음 더하기 전략 워크숍’을 진행하기도 했다. 인권운동이 문재인 정부에 대한 기대가 유독 컸기 때문이기보다는 광장을 가득 채운 촛불의 힘으로 정권을 잡은 정부가 자임해야 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분명히 하는 과정이었다. 또한, 권력을 잡는다고 자연스럽게 인권과제 실현에 앞장서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오히려 인권운동의 과제를 스스로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렇게 정권도, 인권운동더하기도 5년의 시간을 지나 보냈다.
인권운동더하기의 몫
2021년 12월, 20대 대선을 3개월 앞두고 인권운동더하기는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촛불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여전한 보수양당 구도에서부터 출발하는 20대 대선이다. 여기에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들의 정치 행보는 한국 사회의 가치와 비전을 미사여구로 사용하던 기존 정치판의 구도도 따라가지 못한 채 혐오선동과 네거티브 발언을 경쟁한다. 이런 정치 현실이 한국 사회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인권운동이 토론하고, 모아냈던 그 많은 인권과제가 어떤 현실에 놓여 있는지 확인하고 현재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인권운동더하기의 책임이자 몫일 수밖에 없었다.
“문재인 정부 인권현실, 100인의 활동가에게 묻는다”는 그렇게 기획되었다. ‘국가가 시민 위에 군림하지 않는 사회’, ‘더 많은 평등으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생명과 노동의 존엄에 기초한 사회’라는 이름으로 대주제를 분류하고 53개의 문재인 정부 인권의 사건/장면을 선정했다. 2017년 인권운동더하기가 모아냈던 인권과제를 토대로 인권 현실을 드러내는 사건/장면을 추려내서 활동가들에게 다시 물은 것이다. 과연 한국 사회 인권 현실이 2017년에 비해 얼마나 달라졌는지 말이다. 일부 과제가 제도화, 정책화 되었다는 평가만으로는 지금의 인권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할 수 없다. 따라서 지난 5년 문재인 정부 시기의 사건/장면을 돌아보며 지금 인권운동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그래서 앞으로 무엇을 공동의 과제로 삼고 나아갈 것인지 확인해 나가고자 한 것이다.
119인의 인권활동가가 주목한 인권의 사건과 장면
‘국가가 시민 위에 군림하지 않는 사회’에서 인권활동가들이 주요하게 선정한 인권의 사건/장면은 코로나 핑계로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제한하고 감시가 제도화되는 장면과 남북관계 전환과 정전을 이야기하지만 국가보안법 폐지 언급조차 못 하는 정부의 모순적 태도를 꼬집었다. 모두 전통적인 인권의 과제로 이미 문재인 대통령도 정부 출범 이전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해 왔던 것들이었다. 특히, 과거 민주화운동 세력을 탄압하는 도구로 사용되어 온 국가보안법은 문재인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부터 폐지를 단언하며 민주주의 국가로서 최소한의 절차적 진전을 기대했던 영역이었다. 하지만 당선과 함께 폐지에 대한 의지는 실종되었다. 여기에 광장에서 촛불을 든 시민의 힘으로 선출된 정권이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방안을 찾기는커녕 코로나19라는 핑계를 찾아냄과 동시에 집회를 전면 금지시키는 모습 또한 권리 보장은 정부의 선의에 기댈 수 없음을 확인시켜주었다.
‘더 많은 평등으로 더 많은 민주주의를’에서는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흐름이 어디에 멈춰서 전선을 형성하고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무엇보다도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싸움이 이 분류 안에서 인권의 장면으로 가장 많은 선택을 받으면서 동시에 성소수자, 여성, 난민, 청소년 등이 겪는 다양한 권리침해의 현실을 인권의 장면으로 선택했다. 이 응답의 결과는 소수자 집단에 대한 보호 대책, 지원정책만을 언급하고(혹은 그조차도 하지 않으며) 총체적인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정부가 어떤 역할에 나서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없는 국가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했다. 또한, 소수자 문제를 각기 다른 소수자 영역의 싸움이 아니라 연결된 싸움으로 인식하고,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싸움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인권활동가들의 의지가 투영된 결과일 것이었다.
‘생명과 노동의 존엄에 기초한 사회’에서는 다른 항목에 비해 여러 선택지에 인권활동가들 응답이 고르게 분포되었지만, 공통 키워드는 일하는 사람의 죽음이었다. 생명과 안전을 이야기하는 문재인 정부였지만 산업재해 사망사고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에 정부는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하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하고, 현장실습생 안전대책을 내놓았지만 죽음이 반복되는 결과는 막지 못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이윤만을 추구하는 사회를 그대로 둔 채, 안전대책만을 반복해선 결국 누구의 생명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죽음만이 아니다. 코로나19 방역이라는 이유로 아무런 대책 없이 시설을 폐쇄해 시설에 갇힌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는 장면 등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정부가 5년 내내 ‘생명과 안전’을 알맹이 없이 미사여구처럼 사용하며 정작 막을 수 있는 죽음을 방치했다. 이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싸움을 보이지 않도록 만든 책임에서도 드러났고, 인권활동가들은 이 장면들을 모두 놓치지 않고 주목했다.
설문을 위해 준비한 53개의 인권의 사건/장면은 특정한 사건/장면으로 지목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선택지에 포함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 교차하는 사건/장면을 하나의 선택지로 좁히면서 제외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설문에 응답한 인권활동가들이 함께 주목해 봐야 할 인권의 사건/장면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기록해 주었다. 오랜 시간 군사기지 확장에 맞서 싸우는 성주와 강정의 투쟁 장면과 해외 무기 수출을 확장하고 이스라엘과 FTA를 체결하며 팔레스타인 침공을 묵인하는 모습까지 문재인 정부가 평화를 외면하는 모습 등. 설문조사가 다루지 못한 인권 현실까지도 제대로 진단하기 위해 놓치지 말아야 할 장면들을 지목해준 것이다.
이제 싸움을 시작할 때다
이번 인권활동가의 설문 응답을 모아두고 보면 눈에 띄는 특징이 하나 있다. 인권활동가들은 53개의 선택지 중 단 하나의 선택지도 빠짐없이 인권 현실을 드러내는 사건/장면으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 결과는 그저 많은 활동가가 응답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랜 시간 주장해 온 인권과제부터 새롭게 등장한 이슈까지 놓치지 않고 주목하며 인권 현실의 총체를 바꿔내기 위한 활동가들의 ‘운동’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운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인권 현실을 모아낸 설문 결과만으로 인권운동의 과제가 도출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이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운동하는 활동가들의 응답을 모아둔 결과는 인권운동이 마주하고 돌파해야 하는 과제를 도출하는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구체적 현실을 바꿔내기 위한 싸움이다. 혐오를 선동하는 현실 정치권에 더 이상 인권과제를 제안하고 실현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119명의 인권활동가가 진단한 인권 현실을 손에 쥐고 인권운동의 방향에 대해 질문하고 길을 찾아 나설 때다. 차별금지법 만들려면 사회적 합의부터 만들어오라는 정치권에 “우리가 사회다”라고 외쳐 왔듯, 지금 인권운동이 찾아 나설 길은 제도를 넘어 세상을 바꿔내는 운동을 조직하는 일이다. 우리의 삶과 존재를 위태롭게 하는 체제를 겨냥하고, 지금과 같은 제도정치에 우리의 인권을 내맡길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데 이번 설문조사가 조그만 디딤돌이 될 수 있길 바라며 많은 분들이 함께 살펴봐 주시길 요청드린다.
* 설문결과 살펴보기 https://www.sarangbang.or.kr/writing/74176
* 이 글은 <질라라비 221호>에 실린 글을 축약해서 정리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