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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리] Queering gender, Gendering queer

성소수자인권운동-여성운동의 연합 정치를 위하여

* 이 글은 <2015 LGBTI 인권포럼 “우리는 원한다!”>에서 개최한 토론회 “그 페미니스트 참 퀴어하다!”에서 발표한 "Queering Gender, Gendering queer : 젠더를 퀴어로, 퀴어를 젠더로 가로지르는 페미니즘, 언니네트워크를 돌아본다"(미간행)를 바탕으로 수정한 것입니다.

“LGBTI rights leas to gender equality.” 성소수자의 권리는 성평등을 이끈다. - 59차 유엔여성지위위원회,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현지참여단 슬로건 (사진l 나영정(성적지향성별정체성 법정책연구회 상임연구원) 케이(한국레즈비언상담소 활동가) 몽(언니네트워크 전 사무국장))

▲ “LGBTI rights leas to gender equality.” 성소수자의 권리는 성평등을 이끈다. - 59차 유엔여성지위위원회,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현지참여단 슬로건 (사진l 나영정(성적지향성별정체성 법정책연구회 상임연구원) 케이(한국레즈비언상담소 활동가) 몽(언니네트워크 전 사무국장))

지난 3월, <3.8 세계 여성의 날> 주간을 겸하여 미국 뉴욕에서 제59차 유엔여성지위위원회(CSW, Commission on the Status of Women)가 열릴 예정이었다. 때마침(?) 안식월을 얻어 미국에 가게 된 성소수자인권활동가가 있어, 떡 본 김에 제사지내자, 성평등 규범에 한국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새겨 넣을 수 있도록 뭐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한 활동가의 안식월을 ‘해외출장’으로 만들어버렸다. 한편 3.8여성의 날,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한국여성대회에서는 <무지개농성단>에 대한 “성평등디딤돌상” 시상식이 있었다. 서울시민인권헌장을 폐기하고 성소수자 인권을 외면한 서울시에 항의하며 6일간 시청 점거 투쟁을 벌인 성소수자들의 목소리를 ‘성평등’으로 불러낸 현장이었다.

성소수자인권을 ‘성평등’으로 불러내는 이 시도들은 중요한 현장으로 기록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페미니즘이 천착해왔던 ‘여성’ 범주와 여성 간의 차이 문제, 한국여성운동사에서는 ‘영페미니스트’와 ‘레즈비언’, ‘성정치’로 쓰여진 정치 작용이 촉발한 질문을 새로운 시점에서 환기할 수 있도록 한다. 또, ‘여성‘ 또는 ‘성’(sex/gender/sexuality)으로 뭉뚱그려진 그림 속에서 성소수자-퀴어들을 다시 불러낸 것이다.

퀴어링 젠더 Queering gender : 레즈비언, 여성 간의 차이를 말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성․성별․성차를 의미하는 ‘젠더gender’는 ‘사회적 성’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 국내외 성평등이 제도화된 영역에서는 생물학적 성sex와 다르지 않은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용법을 흔들어 왔던 것은 성소수자의 존재와 페미니즘-퀴어담론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데, 한국에서 여성을 퀴어로 가로지르는 정치적 기획의 시작은 1990년대부터 주로 여성운동계라는 영역 안과 그 사이에서 일어났던 것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여성운동사에서 ‘영페미니스트’, ‘성정치’, '레즈비언 페미니즘‘ 등으로 기록되기도 하는 이 정치작용은 한국여성동성애자인권운동모임 끼리끼리(현 한국레즈비언 상담소), 언니네/언니네트워크, 대학 내 총여학생회와 같은 여성자치단위와 성소수자인권모임, 여성학(등) 연구 집단을 실체로 하여 페미니즘과 퀴어, 여성운동과 성소수자운동의 교차로에서 발생했다. 이들은 서구의 페미니즘 사상사 계보에 따르면 어느 정도는 비동시적인 것 또는 세대적인 것으로 나뉘는 제1, 제2, 제3물결 페미니즘, 포스트 페미니즘, 퀴어이론을 거의 동시적으로, 압축적으로 접하면서 호주제, 성폭력, 노동, 가족 등 여성운동 의제에 참여하면서도 레즈비언의 입장에서 여성 간의 차이를 이야기했던 주체들이다.

레즈비언 커뮤니티에 미친 영향도 만만찮다. 한채윤(2011)은 PC통신이 레즈비언 커뮤니티 형성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면서 “PC통신은 레즈비언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해방구였다. 특히 페미니스트 모임에서 생산되는 레즈비어니즘, 성정치, 퀴어이론 등이 레즈비언 커뮤니티에도 전달되어 공유/학습되는 효과도 있었으”며 “오히려 레즈비언 모임이 아니라면 몰랐을 이론과 논쟁들을 접할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페미니스트 정치는, 현재 ‘죽어있다’고 표현하고 싶을 만큼 분란거리가 되지 못하고 있다. 성평등의 제도화 성과는 어떤 페미니즘이 다양한 소수 여성을 배제해온 역사로도 의미화 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배제는, 오히려 분란을 만들어내기 좋은, 많은 청자들을 분란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토양이 되기도 했다. 성평등과 페미니즘에 대한 보수적 반격 속에서는 여러 갈래의 ‘페미니즘들’ 역시 드러나기 어렵다는 현재의 상황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양성평등’이 걸림돌이 될 줄이야

현재의 여성가족부는 ‘여성부’로 출발했다. 그 영문 명칭은 Ministry of Gender Equality(성평등부)에서 Ministry of Gender Equality & Family(성평등/가족부)로 바뀌었을지언정, 한 번도 Gender Equality라는 명칭이 빠진 적은 없다. 최근 여성가족부는 <양성평등기본법>시행에 맞춰 여성가족부를 양성평등가족부로 명칭 변경을 추진하는 중이다. 이미 국무총리 주재 여성정책조정회의는 양성평등위원회로, 여성정책책임관도 양성평등정책책임관으로 바뀌었다. (여성신문 2015.3.22) 성평등의 제도화는 ‘여성’이라는 차별 지위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젠더를 ‘여성’으로 쓰고 읽는 것은 전략적으로 선택된 선명한 표현이기도 했다. 그러나 왜 양성평등인가? 이 속에서 ‘평등’은 왜 필연적으로 ‘양성’을 불러낼 수밖에 없는가?

1999년 <군복무가산점제> 위헌 판결, 2001년 여성부 출범, 2005년 호주제 위헌 결정 등 성평등의 제도화 성과와 동시에 여성, 여성부, 여성운동, 페미니즘은 역차별, ‘된장녀’, ‘보슬아치’로 역풍을 맞이하였다. 여성부는 탄생과 동시에 폐지논란에 휩싸여왔다. ‘남성에 대한 역차별 해소’를 주장했던 <(구)남성연대>는 여성가족부보다 한 발 앞서 명칭변경을 했는데, 2014년 조국・가족・균형을 모토로 <양성평등연대>가 설립되었고 그 정관에 ‘남녀의 조화로운 균형을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적고 있다. 김희정 여성가족부 장관은 양성평등가족부로의 명칭 변경을 앞두고 “남성과 여성의 조화로운 발전을 위해 일하는 명실상부 ‘양성 모두의 부처’로 거듭나겠다”고 하였다. 소름 돋는 짝춤이다.

단순히 같은 문장을 쓰고 있다는 것을 넘어선다. <양성평등연대>가 일방적으로 페미니즘의 언어를 전유했다고만 볼 수 없다. 호주제 위헌 결정과 같은 시기에 여성부는 ‘여성가족부’로 개편되었고 <건강가정기본법> 제정(2004)을 바탕으로 가족 및 영유아 보육업무, 결혼이민자가족지원, 청소년 지원 업무를 순차적으로 편입했다.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도 2005년 폐지되었다. 혼인, 친족, 양육, 노동의 재편을 원했던 ‘여성’의 투쟁은 그 제도화 성과와 함께 이성애적 공동체로 설정된 ‘가족’ 내에서 여성의 역할에 몰두할 것을 약속받는 듯한 명령을 끌어안았다. 이주여성, 미혼모 등 다양한 여성들의 삶 역시 여성의 출산과 돌봄 책임이라는 배경에서 떠오르는 정도로만 다뤄져 왔다.

또한, 헌법 제36조1항은 87년 개헌을 통해 헌법에 유일하게 ‘양성평등’을 기입한 여성운동의 기념비적 성과이다.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는 성평등의 명문화는 훗날 호주제 위헌 결정의 중요한 근거로 사용된다. 그러나 최근 이 조항을 가장 많이 인용하는 집단은 가족 가치를 수호하려는 보수기독교계이다. 간통죄 폐지에 반하여, 동성애에 반하여. <동성애조장 국가인권위법 개정 백만인 서명운동 제2차 세미나>의 제목은 이러했다. “동성애를 허용하면 우리사회에 어떤 문제가 발생할 것인가? : 헌법 제36조 ‘양성평등적 가족’의 관점에서”

‘양성평등’은 혼인과 같은 ‘짝짓기 평등’으로 등장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 새로운 시점에서의 퀴어링

한편 남윤인순 의원은 2014년 <건강가정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한 바 있다. 혼인, 혈연, 입양으로만 가족이 구성되지는 않는다는 인식에서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포괄하자는 취지의 이 개정안은 ‘건강가정’을 ‘가족’이라는 중립적 의미로 바꾸고 ‘양성평등’을 ‘성평등’으로 수정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진선미 의원이 발의를 준비하고 있는 <생활동반자관계에관한법률안> 역시 유사한 맥락에 있다.

성평등이 ‘짝짓기 평등’의 함정에 빠진 것은 ‘섹스, 젠더=남녀’라는 오직 두 가지 계열에 대한 몰두가 빚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의 역사 역시 여기에 기여했으며, 바로 이를 문제화하면서 퀴어링이 촉발되었다. 위와 같은 제도의 모색은 남녀라는 두 가지 계열로부터 벗어나 다양한 주체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짝짓기 평등’에 대한 일종의 퀴어링을 시도하는 것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Gendering queer, 퀴어를 젠더로 가르기

퀴어를 젠더로, 분명하게는 ‘두 개로’ 가르는 것이 여전히 필요하다고도 생각한다. 남녀 간의 차이, 남성성/여성성이라는 경계는 성소수자의 삶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는 자원이 된다. 여기서 ‘차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다. 남성중심적 권력에 주목하는 것(예. ‘레즈비언 평균 소득이 게이보다 현저히 낮다’)과 성차가 비대칭적인 독특성을 낳을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

권력의 차이에 주목하면서도 ‘레즈비언보다 게이가 권력이 있다’는 단순한 결론에 빠지지 않으려면 다음과 같은 태도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 LGBTI 커뮤니티 사회적 욕구조사(2014)에 따르면, 부모님에게 커밍아웃했을 때 그 관계가 악화되는 정도는 레즈비언보다 게이, 트랜스젠더남성(FTM)보다 트랜스젠더여성(MTF)에게서 높게 나타난다. 가족 내에서 ‘아들’로 인지된 자녀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는 것, 남성성과 권력의 상실이 더 비극적인 것으로 경험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즉, 가부장적 사회, 남성중심적 사회가 성소수자의 이야기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굴절된다는 것을 발견하는 페미니스트 분석은 성소수자의 삶과 운동에 접근하는 데에 도움이 되며 이를 매개로 다양한 성소수자가 항상 정체성 별로 분절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연대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질 수 있다.

‘비대칭적 독특성’이란, 하나의 분석틀(예를 들어, 소득수준)을 가지고 차이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마다 각각 다른 분석틀(차이화된 분석틀)을 통해 접근해야한다는 것이다. 한국 LGBTI 커뮤니티 사회적 욕구조사에 참여한 응답자를 살펴보면, 출생 시 성별이 여성인 응답자가 수적으로도 훨씬 많을 뿐만 아니라, 레즈비언・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젠더퀴어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정체화하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 기록은 여성 간의 차이와 범주에 대한 논쟁이 페미니즘이나 여성들 사이에서 촉발되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레즈비언 커뮤니티는 게이 커뮤니티에 비해 내부 지형이 훨씬 더 복잡하다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는 ‘여성만 입장 가능’이라는 표현 하나를 쓸 때도 그 여성이란 범주에 MTF(Male to Female) 및 FTM(Female To Male)트랜스젠더가 포함되는지, 이렇게 굳이 나누어야 하는지, 대체 여성이란 누구인지 등 매우 복잡한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 한채윤(2011), 한국 레즈비언 커뮤니티의 역사, 진보평론 제49호 수록

성소수자운동의 발전과 성평등의 연합 정치를 위하여

앞서 다룬 것을 바탕으로 두 가지 제언을 더하려고 한다.

▲ "성별 고정관념과 불평등에 맞서 저항하는 일, 모두에게 더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 우리의 공통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 31회 한국여성대회 성평등디딤돌상 수상 소감 중 (무지개농성단, 장서연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첫째, 운동의 현장으로서 성소수자 당사자의 삶을 조직하기 위해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다르게 포착해보는 것이다. 하나의 제안으로서, 여성퀴어 또는 LBT(레즈비언,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LGBT에서 게이Gay를 생략한 것)운동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해외에서 LBT운동은 여성운동과 성소수자운동의 역사와 사회문화적 토양에 따라 다르게 발생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남성과는 다른 이슈를 가진다는 의미에서, 또는 게이운동과의 결별이라는 의미에서 분리되기도 한다. 다른 예로, 이슬람문화권인 인도네시아의 한 LBT단체는 근본주의자들로부터 성소수자운동을 보호하기 위해 (비를 막아주는)우산으로서의 여성운동과 전략적 제휴를 하고 있다.

레즈비언페미니스트 운동은 ‘여성’을 퀴어링하는 데에 기여했지만, 생물학적 여성으로서의 레즈비언을 상정하는 경향 또한 없지 않았다. 여성성소수자 간의 차이를 바탕으로 퀴어링을 보다 역동적으로 활성화할 수 있지 않을까. 레즈비언이 ‘여성’에게 일으켰던 분란과 마찬가지로 퀴어링의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둘째, 성소수자를 인지하려는 ‘여성운동계’에 청자를 만들고 지속적으로 관계맺는 것이다. 여성운동과 인권운동은 모두 차별과 평등을 함께 이야기하고 있지만, 제도적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발자취 또한 다르다. 인권운동의 프레임으로서 성소수자운동은 ‘반차별’을 통해 나쁜 관습을 철폐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여성운동의 프레임으로서 성소수자운동은 민주화/시민권의 측면에서 또 다른 토양이 될 수 있다. 유엔여성지위위원회에서 한국 성소수자를 초대한 적은 없지만 무지개행동이 현지에서 참여하기로 한 것은 성평등에 관한 국제인권규범이 LGBT 또는 LBT 틀에서 네트워킹과 호소를 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앞에서 언급했듯 성평등의 제도화 성과 중에는 성소수자 권리 보장을 정면으로 가로막고 있는 부분도 있다는 점에서 바로 그곳에서의 분란(내파)이 필요하다. ‘건강가정기본법’을 ‘가족지원기본법’으로, ‘양성평등’을 ‘성평등’으로 수정하려는 여성운동의 움직임도 기회로 포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문제로 삼는다고 해서 폐기하거나 반대하는 것만이 자연스러운 건 아니며 오히려 제대로 문제 삼으면서 계속 물고 늘어져서 대화를 지속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한 철학자의 말을 빌려, “퀴어링 젠더, 젠더링 퀴어”의 분란이 정치적 기획으로서 활성화되기를 희망한다. 다소 추상적일 수 있는 이 글은 서두에서 말했던 3.8 여성의 날의 두 현장을, 여성운동-성소수자운동의 역사와 미래 사이의 어딘가에 한 점으로 남기고자 하는 바람으로 쓰여졌다.

[참고자료]
한채윤(2011), 한국 레즈비언 커뮤니티의 역사, 진보평론 2011년 가을 (제49호)
여성주의저널 일다, “이성커플에 기반한 ‘양성평등’의 한계”, 2009-08-13 (기사보기)
여성신문, “여성가족부, 양성평등가족부로 바뀌나”, 2015.3.23 (기사보기)

덧붙임

정현희 님은 성적지향‧성별정체성 법정책연구회 상임연구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