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한 만큼 보상받지 못한다는 감각이 팽배해있다. 세상이 공정하지 않다는 외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문재인 정부 이후 ‘공정’에 대한 요구는 기간제 교사 정규직화, 대학입시제도 개편, 공공기관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을 두고 거세게 등장했다. 이런 현상은 ‘능력주의’라는 열쇠말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비판되고 있다. 그런데 능력주의는 훨씬 더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사회를 채우고 있다. 채용 성차별에 대한 여성의 분노, 징병제와 여성할당제에 대한 남성의 분노가 대표적인 예다.
능력에 따라 평가하자는 차별철폐의 흐름
특정 집단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능력을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는 감각은 차별철폐의 역사에서 중요한 흐름을 만들어왔다. 성별을 분리해 채용하거나 다른 호봉제를 적용하거나 여성의 정년을 더 앞당기는 등 여성이라는 이유로 불리하게 대우받는 것을 ‘차별’로 지목하며 변화를 만들어왔다. 한국에서도 직무 수행에 필요하지 않은 성별, 신체 조건, 혼인 여부 등을 서류에 요구하지 않는 블라인드 채용 제도가 확산되고 있다.
동아제약은 국내 제약업계 최초로 블라인드 채용 제도를 도입했다고 홍보한 바 있다. 사진, 학력, 성별을 보지 않고 선입견을 없애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최근 드러났듯 면접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성에 불리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여성에게만 연애나 결혼에 대한 의견이나 계획을 물으며 품평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이렇듯 겉으로는 중립적이지만 특정 집단에 불리한 효과를 낳는 경우도 ‘차별’로 지목해온 것이 차별철폐운동의 역사다. ‘간접차별’ 개념이 그것이다.
미국의 한 전력회사가 내근 배치의 조건으로 고졸 이상의 학력과 지능검사 결과를 요구했다. 13명의 흑인이 소송을 제기했고 1971년 연방대법원은 이를 인종차별이라고 판단했다. 인종불평등의 영향으로 흑인은 백인보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가능성이 훨씬 낮았기 때문이다. 유사한 판단이 미국과 유럽에서 이어졌다. 동일한 신체 기준이 여성에게, 전화 면접이 모국어가 다른 민족에 차별적 효과를 낳는다고 판단했다.
차별을 알아차리는 역량이 커지면서 ‘적극적 조치(affirmative action)’도 공론장에 등장했다. ‘소수자우대정책’으로 불리기도 하는 적극적 조치는 ‘과거의 차별 영향을 제거하고, 현재의 차별을 시정하며, 미래의 차별을 예방’하기 위한 정책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국회의원 비례대표 여성 할당제를 떠올리면 된다. 17대부터 비례대표 후보의 50%는 여성에게 할당되었고 이후 지역구에도 여성 의원이 늘어나는 등 실질적인 차별 시정 효과가 확인되었다.
능력주의에 위배된다는 역차별 논란
누적된 차별의 결과로 능력을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거나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했던 집단의 차별철폐운동은 능력주의에 기대기도 했다. 그러나 능력주의는 차별에 대한 감각을 낮추는 효과를 갖기도 하는 양날의 칼이었다. 현실의 불평등을 능력에 따른 결과로 수용하게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능력이 형성되거나 인정되는 사회구조적 특성을 보지 않을 때 적극적 조치는 역차별 논란에 휩싸이게 된다.
미국에서는 대학의 입학 정원 일부를 소수인종에 할당하는 정책이 줄곧 논란이 되었다. 백인이라는 이유로 기회를 빼앗긴다는 주장이었다. 1973년 의학전문대학원에 지원한 백인 남성이 ‘경제적으로, 교육적으로 불이익을 당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특별전형에 관한 소송을 제기했다. 인종적 소수자를 우대하는 위헌적 제도라는 주장이었다. 이 소송은 미국에서 ‘역차별’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레이건, 부시 행정부가 집권하면서 적극적 조치는 거의 무력화되었다.
한국에서는 적극적 조치도 아닌 ‘군가산점 폐지’가 ‘역차별’의 상징이 되었다. 1999년 헌법재판소의 군가산점 위헌 결정은 간접차별의 개념을 통해 여성에게 차별적인 제도를 폐지했다는 의의가 있다. 군 복무를 마친 사람에게 어떤 보상이 필요한가는 별개의 문제다. 그런데 군 복무로 인한 불이익과 기여가 사회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능력주의 프레임이 ‘남성만’ 징병된다는 ‘억울함’의 정서와 만나, 뒤늦게 시작된 적극적 조치를 무력화하는 힘이 되어왔다.
한국의 적극적 조치는 고용 영역과 고등교육 영역에서 시행되고 있다. 남녀고용평등법에 근거한 적극적 고용개선조치는 2006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했다. 공기업과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을 대상으로 여성고용률과 관리자 비율을 높이기 위한 계획을 세운 것이다. 성별뿐 아니라 ‘지역인재’를 일정 비율 이상 채용하도록 하는 제도도 시행되고 있다. 고등교육 영역에서는 농어촌 지역, 장애인, 기초생활수급자 등을 대상으로 특별전형을 실시하고 있다. 알다시피 이 모든 것이 ‘공정’ 논란의 대상이 됐다.
차별은 줄어들지 않았다
‘역차별’ 논란과 ‘여성우대’ 신화는 차별보다 평등을 먼저 무너뜨렸다. 군가산점 폐지와 남녀고용평등법 개정 등 제도는 개선되었지만 차별은 사라지지 않았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차별은 오히려 견고해졌다. 부부사원을 우선적 명예퇴직 대상으로 설정하고 여성에게 사직 압력을 넣은 농협중앙회 사건, 해고대상자 선정 기준에 배우자 직업 유무를 넣어 기혼 남성 35명 중 2명, 기혼 여성 2명 중 2명을 해고한 일간스포츠 사건을 법원은 모두 차별이 아니라고 했다. 신자유주의와 함께 심화된 능력주의는 ‘인력 활용’이라는 맥락만 남기고 성차별을 세 가지 방식으로 강화했다.
첫째, 평가되는 능력 기준 자체가 성차별적이었다. 체력은 남성의 대표적인 상징 자원이다. 남성만 징병하는 제도가 위헌이 아니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은 남성의 우월한 ‘신체적 능력’을 확언하기도 했다. 여성이 더 연약하다거나 일을 똑같이 해도 결과가 더 적다는 등의 고정관념은 다양한 변주로 영향을 미친다. 직무 분석이나 평가에서 남성이 힘과 기술에 능숙하다는 통념이 작용한다. 남성은 배치나 승진에서 유리해지고 임금수준에도 영향을 미친다.
둘째, 불안정노동이 확산되면서 더 낮은 조건의 직종/직군/직무에 여성이 배치되었다. 이때 노동의 성격이 ‘여성적’이라고 간주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충남도지사와 서울시장 위력성폭력 사건을 통해 ‘비서’의 노동이 알려졌다. 감정노동이나 돌봄노동은 ‘여성’과 연결되고 당연하다는 듯 ‘상냥함’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이런 노동과 자질은 남성의 상징적 신체능력과 달리 필수적이거나 가치 있는 능력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이는 저임금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어진다.
셋째, ‘영혼 없는 제도’가 평등을 왜곡하기 시작했다. 양성평등채용목표제의 역설이다. 1996년 ‘여성공무원채용목표제’는 여성을 위한 적극적 조치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여성 합격률이 급격히 높아지자 2003년 ‘양성평등채용목표제’로 전환되었다. 남성이나 여성 비율이 채용 인원의 30% 이하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면서 초기부터 지금까지 남성이 혜택을 입는 제도가 되었다. 차별철폐의 역동은 사라진 채 수와 비율을 맞추는 것이 평등으로 오해되는 경향은 최근 제기되는 ‘양성평등 복무제’에서도 반복된다.
다시, 반차별의 방향 잡기
2010년대부터 ‘20대 남성 약자론’이 확산되었다. 그런데 남성이 ‘역차별’이라고 주장하는 경험의 상당수는 ‘성차별’이다. ‘남자가 그것도 못하냐’는 관습적 질문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언론은 현실이나 원인을 진단하지 않고 성별 대립만 부각시켜왔다. 정치인들은 갈등 자체만 보면서 페미니즘이 문제인 듯 말한다. 잊을 만하면 ‘남성’을 달래려고 헌법도 무시하며 군가산점을 꺼내든다. 차별은 그대로 두고 가산점이나 쥐어주면서 이쪽 저쪽 기웃거린다.
차별은 사회 전반에 퍼져 있지만 차별을 다투는 쟁점은 주로 고용영역에서 발생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재화·서비스 접근이 화폐라는 단일한 ‘능력’으로 편재됐다면, 고용영역은 거꾸로 인간의 능력이 화폐로 교환되는 영역이다. 그만큼 치열한 투쟁의 장소다. 그래서 차별을 판단하는 기준은 ‘능력’과 긴밀하게 얽혀있다. 차별철폐운동은 고용영역에서 작동하는 차별적 기준을 제거해왔다. 중립적으로 보이지만 특정 집단에 불리한 영향을 끼침을 밝혀온 동시에 해당 기준이 직무에 필수적인지를 살펴왔다.
이러한 변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다만 고용영역 자체의 구성원리나 조직 방식이 달라지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역차별’ ‘불공정’ 논란이 불거졌던 영역이 고임금과 안정적 지위를 누리는 직종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남녀고용평등을 위한 조치는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들을 대상으로 하고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정책은 공공기관이 대상이었다. 인정과 보상의 몫이 점점 더 일부 계층에 쏠리고 있다. ‘능력주의’로 진단되는 흐름은 업무 능력을 제대로 평가해달라는 논리가 아니다. 노동 세계에서 의미 있는 자리를 얻고 싶다는 바람이 방향 잃고 어지럽게 터져나오는 것이다. 이것을 성별이나 고용형태 간 대립으로 보는 것은 반차별운동을 후퇴시킨다. 적극적 조치나 정규직 자체가 평등은 아니다. 일의 세계에서 존엄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을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
공정하게 대우받고 싶다는 감각은 평등과도 연결된다. 능력을 평가하는 것 자체가 차별은 아니다. 이윤의 관점에서 ‘능력’을 일률적으로 평가하고 화폐라는 단일한 기준으로 보상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문제다. 이때 구조적 차별이 강화되고 구조적 차별은 다시 체제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한다. 반차별운동은 이 되먹임구조를 끊는 역할을 해야 한다. 시간제 노동에 전일제 노동보다 낮은 시간당 임금을 매기거나 연금에서 배제한 것을 성차별로 금지하거나, 직업경험이 적은 사람을 모집하는 것이 인건비를 줄이려는 목적이라면 정당화될 수 없다는 차별 판단(독일) 등을 참조할 만하다.
평등으로 전진하자
평등은 차별이 사라져 모두가 모두를 존중하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다. 차별을 발견하고 해석하고 대항하며 권력관계를 바꾸는 동적인 과정이다. 특정한 정책이나 제도, 사법부의 판단에 갇히지 않고 평등을 이루기 위한 힘을 조직할 때 능력주의도 해소될 수 있다. 이때 페미니즘의 사상과 실천이 중요하다. 페미니즘은 가사노동이나 돌봄노동에 주목하며 노동의 배치와 위계에 저항해온 동시에 우리가 존엄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역량을 재발견하고 재배치하는 힘을 만들어왔다.
‘능력 있는 나’를 추구하는 것이 평등의 전략일 수는 없다. ‘능력’을 키워서 안정적인 지위를 확보하더라도 구조적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 닫힌 회로를 벗어날 수 없다. ‘명예남성’이 되거나 ‘여성성’을 추구하거나, 장애를 ‘극복’하거나 정체성을 ‘커버링’하거나, 선택지는 정해져있다. ‘능력 있는 나’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집단으로서 차별에 함께 대응하는 힘을 감소시킨다는 점에서도 위험하다. ‘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평등한 관계다. 노동세계의 변화에 주목하며 페미니즘과 함께 평등으로 전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