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전자주민카드의 위협
지난 6월 초순, <인권하루소식>에 배달된 한 통의 우편물에는 최 모 씨의 주민등록등본이 들어 있었다. 이 등본의 뒷면은 광고지였다.
확인 결과, 취업알선을 명목으로 수강생들에게 받은 주민등록등본을 이면지로 활용해 광고지를 인쇄한 것이었다. 학원 측은 “실수로 이면지에 섞여 들어간 것 같다”고 해명했다.
이 경우 해당 학원생들의 구체적인 피해사실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학원 측이 어떤 처벌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 법률적 해석이었다. 같은 시기 서울의 한 아파트, 우체통마다 전 가족의 주민등록번호가 적힌 전단이 꽂혔다.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증을 경신하라는 통고를 한 것이었다. 당사자들은 ‘이런 식으로 개인의 신상정보가 유출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아느냐’며 경악했다.
전국민을 상대로 발급하는 강제적인 신분증 하에서는 이런 사고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
상품광고지 발송을 위해서나 범죄대상 선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목적으로 국민 개개인의 정보가 거래될 수 있다. 개인정보가 누군가에 의해 손쉽게 복제되고 변형되고 대량으로 제3자에게 넘겨질 수 있는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이런 상황의 개선을 도모하기는커녕 오히려 엉뚱한 구상을 내놓았다.
지난 96년, 42가지 개인정보를 하나의 집적회로(IC)카드에 입력해, 전국 어디서나 개인의 정보를 조회하고 발급 받을 수 있는 형태의 신분증, 즉 전자주민카드를 도입하려 한 것이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우려가 만분지 일만 된다 할지라도 정보를 아예 흩어진 상태로 놔두는 것이 낫다는 외국의 일반적인 견해를 거스르는 일이었다. 지극히 ‘선진적’이며 ‘획기적’인 방식이라는 선전 속에 추진된 이 사업은 사회각계의 거센 반대와 때맞춰 닥친 경제위기 속에서 침묵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자주민카드의 음모는 여전히 활동중이라는 의혹이 이번 주민등록경신 사업에서 제기되고 있다. 새로 도입되는 플라스틱 주민등록증에서 풍기는 냄새가 심상치 않은 것이다.
개인정보의 집중화와 집중된 개인 정보를 네트워크로 주고받는 정보흐름의 대량화를 본질로 하는 전자주민카드의 핵심은 플라스틱 주민증에 그대로 살아있다.
또한 전자주민카드 발급을 위해 미리 구입해 둔 전자주민카드용 카드원판과 카드제조기, 주전산기 등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전보다 더 많은 주민등록정보를 전산화시키고 있으며, 주민등록정보공동활용방안을 통해 이를 기업에게까지 공개하려 하고 있다.
결국 주민등록경신사업은 IC 칩만 빠졌을 뿐 모든 전산장치들은 전자주민 카드사업의 계획대로 추진되고 있어,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전자주민카드를 시행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고 있다.
전자주민카드의 도입을 경계했던 사람들은 그 폐해를 지적하면서 ‘환경파괴’와 같다는 예를 든 일이 있다.
처음에는 그 영향을 잘 모르겠지만 엄청난 후과를 가져오는 환경파괴처럼 플라스틱 카드에 쌓여 가는 정보와 관리체계는 전자주민카드가 몰고 올 파장을 회피하기 위한 ‘훈련용’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