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초면 비전향 장기수 할아버지들이 북한으로 돌아갑니다. 남북정상회담과 적십자회담의 합의에 따라 '북송을 원하는 비전향 장기수 전원이 조건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60명 남짓 될 것 같습니다. 남북관계 관련 보도를 맡고 있는 일선 기자(전 통일부 출입 기자입니다)로서, 그 많은 할아버지들이 북으로 돌아가겠다고 선택한 사실을 앞에 두고 마음이 복잡합니다. 솔직히 놀랍기도 하구요. 한때 수백 명을 헤아리던 비전향 장기수 가운데 이제 생존해 계신 분은 80여명. 이들의 압도적 다수가 '자의에 의해' 북한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왜? 피붙이. 50년 안팎을 헤어져 지낸, 기억도 희미한 처자식들을 만나러 고향에 돌아가야겠다는 것입니다. 북쪽 가족들이 보내온 편지와 녹음테이프, 비디오테이프를 닳고닳도록 거듭 읽고 듣고 보며 눈물짓는 할아버지들을 보노라면 가슴에 멍울이 지는지 답답해집니다(할아버지들의 회한과 달리, 솔직히 전 북쪽 가족들의 편지와 녹음테이프, 비디오테이프에 담긴 내용의 '공식성'이 좀 부담스럽고 불편했습니다. 이런 느낌도 이데올로기적 편견일까요?). 왜 그리 오랜 세월동안 피붙이조차 만나지 못하게 했는지, 미친 세월이 한탄스럽습니다.
신인영 할아버지(72)는 북으로 돌아가기 위해, 32년 동안 옥바라지를 하신 노모 고봉희(93) 할머니와 헤어져야 한다는군요. 송환은 당사자 원칙에 따라 이뤄지는 바람에 고 할머니는 아들을 따라 북에 가실 수 없다는군요. 또 다른 이별은 많은 것을 생각케 합니다.
남쪽에 남기로 하신 분들도 있습니다. 세계 최장기수 출신인 김선명 할아버지는 남기로 하셨답니다. 안학섭 할아버지(70)는 7월 1일 결혼식을 올리셨어요. 결혼은 남쪽에 남는 것을 뜻하는 것이죠. 안 할아버지는 그러시더군요. '사람이 어떻게 사는 건지 보여주고 싶다'고. '빨갱이 가족'으로 몰리는 게 힘겨워 자신의 존재를 부정했던 가족들에게, 할아버지의 오랜 감옥생활과 비전향이 양심에 따른 것임을 몸으로 다시 보여줘 화해하고 싶다는 뜻 같습니다.
떠나는 분이나 남는 분이나 입을 모아 '조국통일'을 되뇌시더군요. 함세환 할아버지는 '우리가 가기만 하면 아무 의미가 없어. 서로 왔다 갔다 해야지'라고 힘줘 말씀하시던데…. 미혹한 탓인지 전 '통일'이란 말에 별 실감이 없습니다. 오히려 평화공존에 대한 갈망이 크죠. 통일이란 '더 나은 삶'을 위한 합치기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미친 마녀사냥을 잠재울 평화공존의 시간 없이 어느 날 합쳐진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할아버지들의 선택이 오랜 적대의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화해의 훈풍이 되리라 믿습니다. 북에 가시는 할아버지들이 마음 고생 없이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실 수 있었으면 합니다. '조국'이 할아버지들을 실망시키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또다시 괴로워 하시기엔 그동안 고통의 세월이 너무나 길었습니다.
이제훈 (한겨레 기자)
- 1672호
- 이제훈
- 2000-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