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은 이용물에 불과했다
오는 25일 김대중 대통령 취임 3주년을 맞는 우리는 3년 전 걸었던 기대가 허망하게 무너졌음을 절감한다. 각종 인권영역에 있어 김대중 정부 아래 인권상황은 대체로 제자리걸음 또는 몇몇 중요 부문에서의 후퇴로 요약된다. 기회 있을 때마다 인권에 대한 신념을 밝히며 인권을 자신의 이미지로 삼았던 김 대통령은 자신이 내놓은 숱한 약속을 수행할 의사도 능력도 없음이 밝혀짐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권을 정치 목적에 이용한 격이 되어 버렸다.
김 대통령은 "국민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 참된 국민의 정부"(98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사)의 자신감으로 "국민 개개인의 인권문제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을 것"(98년 6월 국제인권연맹 인권상 수상 연설)을 국민과 국제사회를 향해 기회 있을 때마다 다짐했다. "인권대통령으로서 남고 싶다"(1999년 5월 CNN 위성회견)는 소망과 "인권과 평화에 일생을 바칠 것"(2000년 12월 노벨평화상 수상연설)이라는 맹세는 김 대통령의 주요 어록에 기록됐을지 모르나 우리에게는 거짓과 위선의 상징이 되었다.
취임 첫해는 IMF위기로 인한 기다림이 있었다. 2년째에는 이제 뭔가 시작할 것이라 기대했다. 3년째에는 노벨 평화상 수상으로 인한 반전과 분발의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김 대통령은 우리의 인내와 기대와 경고를 모두 무시했다. 과거 군사 독재정권의 인권침해 잔재를 제거하고 새로운 인권보호제도를 세워 나가야 하는 역사적 의무를 요구받은 '국민의 정부'와 '인권대통령'은 전향제도의 다른 이름인 준법서약서를 도입했을 뿐더러 과거 독재자와 부정부패 사범과 엮어 양심수를 처리했다. 국내외 인권단체들이 우선적으로 처리할 것을 기대했던 국가보안법 개폐는 아직껏 진전이 없다. 유엔의 기준에 부합되고 인권단체가 환영하는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들겠다더니 3년 내내 법무부에 끌려 다녀 누더기가 된 국가인권위법안을 우리에게 내밀고 있다. IMF 위기와 구조조정의 터널은 노동자에게만 강요되고 있고, 그 터널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은 김대중 정권의 폭력으로 차단되고 있다. 20대 80의 사회로 가는 불행한 증거들이 곳곳에서 넘쳐나고 있다. 안기부(현 국가정보원), 검찰, 경찰, 법원의 개혁, 과거 인권유린이나 부정부패 혐의자에 대한 배제, 사형제도의 폐지, 과거 및 현재 인권침해사건 조사, 인권교육의 증진, 노동조합의 권리보장, 이주노동자 등 소수자에 대한 인권보호, 국제인권조약의 준수 등 인권관련 개혁과제들에서 보여지는 것은 '정체'와 '후퇴'요 '시늉' 뿐이다.
우리가 보건대 '인권대통령으로 남고 싶다'는 김 대통령의 소망은 '인권 침해자로 남고 싶지 않다'로 수정돼야 할 것이다. 이 또한 조건이 있다. 20세기 유물인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않는다면, 국가인권위원회의 궤도를 수정하지 않는다면, 국민의 삶을 위협하는 신자유주의 정책 기조를 전환하지 않는다면 '인권 침해자'라는 평가마저 너무 가벼운 것이 될 수 있다. 전 세계 인권운동가들의 구명대상이었던 양심수 대통령, 인권상과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대통령에게 인권단체가 등을 돌린 현실을 직시하라. 김 대통령의 선전도구로서의 인권론은 이미 수명을 다했다. 이제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김 대통령 자신을 위해서라도 인권 관련 과제 해결에 나서야 할 것이다.
2000. 2. 22
인권운동사랑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