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군부, 반군소탕 전투태세 돌입
26년 만에 찾아온 아체의 '평화의 봄'에 또다시 차가운 겨울 칼바람이 불고 있다. 최근 인도네시아 정부가 아체의 무장독립운동을 완전 소탕하기 위해 또다시 전투태세를 갖추기 시작한 것.
지난해 12월 9일 제네바 주재 국제인권단체인 앙리 뒤낭 센터의 중재로 정부와 분리독립운동 세력인 자유아체운동(GAM) 사이에 휴전협정이 맺어지면서 '분쟁과 학살의 섬' 아체에 평화의 기운이 움틀 것이라는 기대가 모아진 바 있다. 당시 휴전협정에는 아체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것을 전제로 △정부군 철수 △자유아체운동의 무장해제 △과거 인권침해 조사 등이 규정됐다. 그러나 휴전협정 이후에도 유혈사태는 끊이지 않았고, 양측의 무장해제는 물론 인권침해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난달만해도 유혈사태로 50여명이 사망하는 등 휴전협정은 사실상 넝마조각이나 다름없는 상태다.
그런 가운데 지난달 24일 수실로 밤방 보안장관은 잇따른 유혈사태의 책임을 자유아체운동에 돌리는 비난 기자회견을 가진 데 이어 25일 열릴 예정이었던 평화협상도 철회시켰다. 뒤이어 28일 인도네시아 정부는 자유아체운동에 2주 내에 무장해제를 시작할 것을 요구하는 최후 통첩을 제시, 이에 따르지 않을 경우 군사 조치도 불사하겠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최후 통첩 시한이 만료된 12일까지 자유아체운동의 무장해제는 이뤄지지 않았다.
현재 인도네시아 정부는 아체로 4천여명의 병력을 증파하고 주변에 추가 병력을 배치하는 등 속속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다. 자유아체운동의 지도부 역시 유혈사태의 책임은 정부군에 있다고 맞비난하면서 방아쇠를 당길 준비에 들어갔다. 교전이 임박하자, 12일 50명의 국제 평화감시단도 아체에서 철수했고, 주민들도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일각에서는 잇따른 유혈사태가 휴전협정을 무산시키려는 정부군의 지원을 받은 민병대의 소행이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군부가 아체에 대한 대대적 공격을 지난 98년 수하르토 독재정권의 몰락 이후 상실한 권력을 되찾을 수단으로 삼고자 한다는 것이다. 최근 브뤼셀 주재 국제위기그룹(ICG)이 지난해 10월 발리 폭탄테러의 배후조종 혐의를 받고 있는 제마 이슬라미야(JI)와 군부의 연루 의혹을 제기한 바 있는데, 이 역시 '반 테러리즘'과 '국토 통일'을 명분으로 군부가 영향력 회복을 꾀하고 있다는 의혹을 뒷받침하고 있다.
과거 잔혹한 인권침해와 부정부패로 얼룩진 수하르토 독재정권을 32년간 떠받쳐 왔던 군부가 아체에 군사조치를 감행하고 인도네시아 전체에 그 영향력을 확대할 경우, 아체는 물론 인도네시아의 인권은 크게 후퇴할 전망이다.
풍부한 자원과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해 51년 인도네시아에 강제 합병된 아체에서는 76년부터 지속돼 온 분쟁으로 최소 1만2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강간, 고문 등 광범한 인권침해가 자행됐다. 대부분의 인권침해는 군부가 아체를 점령, 반군소탕작전을 펼친 89년∼99년에 집중돼 있다. 더구나 군부는 아체에서 천연가스 산지를 운영하고 있는 미국의 엑손 모빌에 보안군을 제공하는 대가로 큰 수입을 거둬들이고 있으며, 무기거래는 물론 마약 밀매, 인신매매, 불법 벌목 등에 연루되어 있다는 광범위한 의혹을 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군부의 영향력 확대는 큰 인권재앙을 불러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