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빠르게 발을 놀리며 길을 걷는 시민들에게 애써 홍보 전단지를 나눠주는 아주머니, 신장개업을 한다는 음식점 홍보를 위해 커다란 스피커 앞에서 짧은 미니스커트 입고 몸이 부서져라 춤을 추는 앳된 여성,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지하철 계단을 묵묵히 걸레질하는 예순을 앞둔 아주머니….
이렇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행렬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지만, 비정규직 차별문제를 해결하겠노라 공언했던 노무현 정부 하에서 한 비정규직 노동자는 몸에 신나를 부어야 했다. 고 이용석 광주전남본부장의 분신이 도화선이 되어 달아오른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대오 한 가운데는 생전 파업이라고는 처음 해본 여성노동자들이 있었다.
"처음엔 그냥 그러려니 했어요"
한 달이 넘게 지속된 농성장 한 켠을 변함없이 지키고 있었던 근로복지공단 서울서부지부 소속 여성 조합원 이호영 씨. 그녀가 처음 비정규직 노동자로 근로복지공단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지난 2002년 3월이었다. "사실 입사하고 처음 1년 동안은 노동조건에 대해 크게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어요. 사회 생활이 다 그러려니, 계약직 노동자니까 그러려니 여기면서 그렇게 살았죠."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동일한 업무를 맡고 있으면서도 정규직 노동자의 60%에 불과한 임금을 받아야 했고, 정규적으로 실시되는 '근무성적평정' 탓에 담당자에게 밉보이면 언제든지 해고 대상이 될 수 있는 그런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러한 분노가 올해 4월 비정규직 노조 건설로 이어졌다.
하지만 호영 씨는 "처음 노조가 만들어졌을 때에도 조합원 가입이 썩 내키지는 않았다"고 고백한다. 아직도 노동자는 '근로자'일 뿐이고 '노조'와 '파업'은 금기어로 치부되는 이 땅에서, 노조를 설립해야 한다는 절박감과 노조에 대한 거리낌이 불가피하게 공존했을 것이다. 그랬던 그녀가 비정규직 노조의 한 조합원으로 10월말부터 40일이 넘게 차디찬 농성장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지사장이 누가 오느냐, 부장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들이 많았어요. 평소에는 정규직 노동자들과 친하게 지내다가도, 업무 분담을 할 때면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고스란히 온갖 잡일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여성 노동자에게 당연한 업무 가운데 하나로 치부되는 커피 심부름도 정말 하기 싫었지만 "내가 하지 않으면 다른 여성의 몫이 되는 일"이기에 쉽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고 호영 씨는 말한다.
지난해 11월 근로복지공단 정규직 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때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8일 동안 과도한 업무에 시달려야 했다. "회사에서 '여러분은 모두 다 우리 식구'라며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하더니 막상 정규직 노동자들이 복귀하자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행동이 싹 바뀌더라고요. 소리낼 수 있는 단일한 창구가 없었던 비정규직들에게 노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때 어렴풋이 느꼈어요."
죽음, 그리고 40여 일간의 파업
10월 26일 이용석 광주전남본부장의 분신이 있은 바로 다음 날, 호영 씨를 포함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곧장 파업에 돌입했다. 정부 산하기관인 공단에서부터 먼저 비정규직 채용을 중단하고 고용 안정을 보장하라는 지극히 당연한 요구를 내걸었지만, 사측과 노동부의 버티기는 완강했다. "따뜻한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었던 농성장에 몰려들던 추위가 가장 견디기 어려웠어요." 조합원들이 이렇게 차가운 농성장을 지켜내고 있는 동안, 이용석 씨의 시신도 차가운 냉동고 안에 놓여있어야 했다.
처음 500여 명이 못되는 대오가 농성을 시작하였는데, 하나둘 빠져나가 결국에는 100여 명만 남았다. 사측의 회유와 협박이 계속 이어진 탓이다. "각 지사별로 농성장에서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빼왔느냐를 수치화해서 인사평가를 매긴다고 하니 지사장들이 농성을 방해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어요." 이런 상황에서도 호영 씨는 굳건히 버텨냈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해볼 수 있을 때까지 해보고 싶었어요. 무엇보다 지사 동료들이 함께 버텨준 게 큰 힘이 되었어요."
결국 이달 6일, 향후 비정규직 직원 확대를 중단하고 정규직 채용 시 50%를 비정규직에서 충원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노사타결이 이루어졌다. 38일만에 이용석 씨의 장례가 치러지고 모두들 다시 일터로 돌아갔지만, 당장에 달라진 점을 발견하기란 힘들다. "한 노동자의 죽음, 40여일 간의 파업, 혈서, 단식 등 이런 노력들에 비해서 얻은 성과들이 약소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제 떳떳하게 노조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당장 가시적인 무언가를 얻어내진 못했지만 이제부터라도 뭔가 할 수 있지 않겠어요?"
"비정규직 자체가 없어져야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자존감마저 버릴 것을 강요하는 현실 앞에서 호영 씨는 당당히 말한다. "비정규직이라고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 제도적인 문제라고 인식하고 거기에 눈을 돌렸으면 합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기에 억울하면 시험을 쳐서 정규직 노동자가 되라는 현실의 속삭임에도 그녀는 "비정규직 노조의 최종 목표는 비정규직을 철폐해서 비정규직 노조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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