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흔히 말하는 복학생이다. 돌아온 학교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다. 하지만 후배들을 만나면 변치 않는 거북함이 느껴진다. 후배는 묻는다. "몇 학번이세요?" 학번을 간신히 확인하면 경건한 표정을 지으며 한마디 한다. "말씀 낮추세요" 대학이라는 곳 역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나이를 따지지 못하면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는 곳인 것이다.
복학을 앞둔 즈음에 나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관계로 소통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했었다. 많은 후회와 시행착오를 겪었는데, 처음엔 관계의 평등 운운하며 반말하다가 선배들에게 싸가지없다고 맞을 뻔도 했고, 그래서 존댓말로 바꿔보니 후배들이 불편하다고 어색해 한다. 하루에 열 번은 '말씀 낮추라'는 '몸둘 바 몰라하는' 후배들을 보게 된다. 나 역시 적당한 호칭을 찾지 못해 아무개 씨, 아무개 군, 아무개 양이라 부를 때마다 후배들로부터 느끼하다는 핀잔을 듣곤 한다. 밥 사주기 싫어서 존대한다는 촌철살인적(?)인 비난도 받았다.
추측하는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나의 소신은 간단하다. 소통이 위아래가 생기면 관계도 이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이를 너무 간단히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이든 줄 세우기를 즐겨하는 우리 문화의 근본에는 보는 것마다 자잘하게 나눠서 위아래 파악을 해야 소통이 가능한 왜곡된 언어체계가 있다. 어쩌면 우리는 군사문화의 창달에 가장 어울리는 언어체계를 지닌 민족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빛나는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많은 부분을 잃고 있는 건 아닐까.
평등한 소통관계로의 전환은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말할 때 우리는 서로를 비로소 존중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다. 굳이 서로 존댓말을 쓰지 않고 반말을 쓰더라도 호칭을 바꾸면 관계의 평등은 금새 이루어진다. 오빠, 누나, 선배에서 아무개 씨로의 전환은 괜시리 생긴 위계의 거품을 털어 낸다. 가장 친밀한 연인사이에서도 닭살스러울 것 같던 존댓말은 누가 누구를 지켜주는 관계를 벗어나 서로에게 같은 크기의 존중을 선물한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여전히 내게 숫자를 물어온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나이와 학번이 별로 궁금하지 않다. 당신도 내 나이와 학번에 대한 거의 본능적인 궁금증을 거두어 주면 좋겠다.
- 2570호
- 문재승
- 2004-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