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일이다. 청소년들 스스로 학내 인권침해의 상징인 두발규제에 저항하기 위해 조직력을 발휘하는 일대 사건이 터졌었다. 두발규제 철폐의 목소리는 청소년들 사이에서 삽시간에 번져나갔고, 이러한 움직임은 당시 청소년들의 미디어 수요 폭발에 따른 온라인상의 열기와 언론의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 그리고 청소년 인권단체들의 거리시위전이 고루 3박자를 만들면서 무형의 저항이 아닌 유형의 저항이 벌어지게 되었다.
당시 청소년들이 보여준 힘은 실로 대단했다. 청소년들이 표면적으로 내세운 것은 '두발자유'였지만 그 운동 전체가 내포하고 있던 실질적인 슬로건은 군부독재의 암울한 과거시절을 거쳐 오늘날까지 철저히 무시되어 왔던 '학생인권'의 보장이었다. 때문에 교육당국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우리 머리 좀 기르게 허락해주세요~"라는 어리광이 아닌 "청소년의 정당한 신체의 자유를 보장하라"라는 논리적 주장에 어찌 할 바를 몰라 허둥댄 것이다. 여태껏 어리다고 간과해왔던 청소년들이 조직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사회적 동의까지 이끌어내는 모습에 당황한 교육당국은 처음에는 두발자유를 외치는 청소년들을 색출해 탄압하라는 공지를 내려 보내다 결국 학교별로 의견수렴을 거쳐 두발규정을 다시 만들라는 미온적인 조치를 내리면서 두발문제에서 발을 빼버렸다. 학생 인권을 보장해야 할 교육당국의 책임을 회피한 채 개별 학교단위의 '결정', 정확하게 말하자면 '학교장'에게 내맡겨버린 것이다.
이렇게 학생인권이 학교장에게 위임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자, 몇몇 학교에서는 학생, 학부모, 교사 3자간 토론만을 형식적으로 치른 채 머리 길이 제한을 약간 풀어주는 선에서 아래로부터의 두발자유화 요구를 무마시켜 버렸다. 그리곤 다시 예전과 다를 바 없는 규제관행으로 돌아갔다. 언론 역시 애초 '청소년이 들고 일어났다'라는 선정적인 이슈 제기가 독자들의 관심사에서 차츰 멀어지자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다. '몇cm 더 풀어준다'라는 조삼모사 격 지침 아래 본래 의도했던 인권 보장의 의미는 흐지부지해져 버린 것이다. 그렇게 2000년 한 해를 달구었던 폭발적인 두발자유화 운동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2005년, 새로운 시작
그 후 5년이 지났다. 김수영 시인의 '풀'처럼 한 차례 비바람이 몰아치고 난 뒤 고요함이 찾아온 들판 위로 다시 두발자유화를 외치는 열기가 시작되고 있다. 불합리한 현실에 대항하자며 터져 나온 청소년들의 외침은 온라인으로부터 시작되어 차츰 오프라인으로 이어지면서 새롭게 결집되어 가고 있다.
두발문제가 다시 불거져 나온 곳은 인터넷 유명 포털사이트의 시민청원 콘텐츠에서 비롯된 카페모임이었다. 이 카페모임에서 일명 '바리깡'이라 불리는 강제이발을 당하는 등 인권침해를 당한 학생들이 불만을 성토하기 시작했고, 이후 학교별로 일명 '락카시위', 학교 홈페이지에 항의문 올리기 등의 사건들이 잇따라 터지면서 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인터넷 청소년신문 '바이러스'도 두발자유로 인한 인권침해 사례들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청소년운동가들이 두발자유운동에 하나둘씩 나서기 시작했고, 많은 청소년들이 아래로부터 결집하기 시작했다.
현재 '두발자유학생운동본부', '두발자유법제화를위한연대', '학생인권수호네트워크' 등의 조직으로 결집한 청소년들은 단체간 연대를 통해 문제의 심각성을 공유하는 한편, 한데모여 통합된 행사를 준비함으로써 올해를 두발자유화의 원년으로 만들기 위한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각개 분산식의 운동을 넘어 청소년들의 역량을 한데 집중시킴으로써 두발규제를 철폐하고 학생인권 보장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움직임이 모색되고 있는 것이다. 오는 5월 14일에는 두발규제 폐지를 위한 거리퍼포먼스, 자유발언대, 촛불집회 등의 다양한 행사를 집중적으로 벌임으로써 두발자유화 요구를 거리로 들고 나올 예정이다.
이와 함께 시민사회단체들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사회진보에 힘써온 기존 사회단체들은 사회단체지원본부를 구성하는 등 청소년들이 벌이는 두발규제 폐지운동을 적극 지원하기 위한 여러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특히 폐쇄적인 학교문화와 억압적인 교칙으로 인해 두발규제 폐지운동에 참여하는 청소년들이 실제 징계나 자퇴 권유 등 유무형의 탄압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학생인권을 탄압하는 학교나 교육당국에 맞서 '보호막' 역할을 담당하는 등의 지지활동을 계획하고 있다.
이처럼 2005년 새롭게 시작되는 두발자유운동은 과거에 비해 한 단계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 단체가 운동을 일방적으로 주도하거나 청소년 활동가들 사이의 대립 없이 역량을 집중시켜 문제의식의 대중적 확산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 관련학생을 색출해 처벌하라는 광주시교육청의 공문을 무효화시키거나 몇몇 학교의 징계 움직임을 저지시켜 내는 등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화된 모습으로 탄압에 맞서 나가고 있다는 점, 시민사회단체들의 결집까지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 등은 올해의 운동이 상당한 성과를 낼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만든다.
공회전을 막기 위해
올해 새롭게 꿈틀거리고 있는 두발자유화 운동은 한편으로는 청소년인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다시 집중된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도 담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5년이나 지났는데도 학교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암담한 메시지를 담고 있기도 하다. 때문에 새로 시작된 두발자유화 운동은 5년전의 시행착오를 똑같이 되풀이하는 공회전이 되어서는 안된다. 발전적인 방향으로 운동을 이끌어가야 하지, 5년마다 같은 일을 되풀이하면서 사회적 이슈를 제기하는 선에서 만족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주의해야 할 점은 이 운동이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청소년문제와 관련된 내용들은 매번 그때그때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한 기삿거리 정도로만 이용된다. 얼마 전 있었던 학내 종교의 자유 투쟁만 하더라도 언론은 새로운 사건에 대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특정인물 띄워 주기'식의 구도를 만들어가다 이내 관심을 꺼버렸고, 실제적인 변화를 일구어내지 못한 상태에서 운동도 결국 끝나버리고 말았다. 지난 두발자유화 운동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따라서 이번 두발자유화 운동은 언론의 포커스 여부와 상관없이 학생인권과 관련하여 지속적인 활동을 꾸준히 전개해나갈 수 있는 학생주체들의 대중조직이나 네트워크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리고 지난 경험에서 얻은 소중한 가치인 '청소년 스스로'를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 지난 2000년 두발자유화 운동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작은 규모의 학생자치활동이 시작된 때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되짚어볼 때, 청소년들은 청소년이라는 세대 차원에서 스스로 사회의식을 쌓아왔다. 두발자유화 운동 역시 이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인 청소년들이 스스로 나서 정치적·사회적 힘을 가진 세대계층을 형성해가는 과정의 중요한 단계인 것이다. 또한 지금의 두발자유화 운동의 생명은 당사자인 청소년들이 직접 자신들의 인권 보장을 외친다는 데 있다. 따라서 '청소년 스스로 운동을 일구어가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는 선에서 기존 사회단체들과의 연대를 구축해 나가야 할 것이다.
덧붙임
조상신 님은 '전국중고등학생연합'에서 활동했고, 현재는 청소년인권연구포럼 아수나로(ASUNARO)에서 활동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