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하루소식

"공안문제연구소 감정목록 비공개 정당하다"

서울행정법원, "3급비밀로 국가안보 위험"

법원이 공안문제연구소 감정목록의 정보공개청구를 거부한 경찰청의 손을 들어준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물의를 빚고 있다. 또 재판과정에서 김대중 정권 출범 초기인 98년에 이미 경찰대 보안심사위원회가 감정목록의 외부 누설시 표현의 자유 등에 대한 사회적 논란을 우려해 비밀로 지정한 사실도 밝혀졌다.

지난달 31일 서울행정법원 제13부(재판장 이태종)는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건국대 학생모임 시놉티콘'(아래 시놉티콘) 회원 이호영 씨가 지난해 6월 낸 공안문제연구소 이적표현물 감정목록 등에 대한 정보비공개 결정처분 취소청구를 기각했다.

이미 감정목록과 일부 감정서는 지난해 말 최규식 의원(열린우리당)이 국정감사 과정에서 언론에 공개했고 이에 따른 비난 여론으로 공안문제연구소는 조만간 폐지될 전망이다. 하지만 감정목록은 여전히 '3급비밀' 상태로 묶여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어 이번 판결은 여기에 면죄부를 준 셈이다.


재판부, "누설되면 국가안전보장에 손해"

서울행정법원은 판결문을 통해 "일반 국민이 공공기관에 대하여 그 관리·보유 중인 정보를 공개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적극적 정보공개청구권은 국민의 선거에 의해 구성된 정부가 취득·보유하는 모든 정보는 국민의 것이고 그 모두가 국민에게 원칙적으로 공개되어야 한다는 국민주권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헌법의 기본적 요청으로서 헌법에 직접 근거를 갖는 청구권적 기본권"이라고 전제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보안업무규정에 의하여 3급비밀로 지정되는 비밀은 누설되는 경우 국가안전보장에 손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정보"로 "적법절차에 따라 3급비밀로 분류·지정된 정보는…(정보공개법에 따라) 원칙적으로 열람 및 공개가 제한되는 비공개대상정보"라고 판단했다. 또 "공안문제연구소가 설립 후 지금까지 감정했던 해당사건에 관한 정보는…감정목록에 포함되어 있지 아니한 것이 명백"하다며 경찰청의 손을 들어줬다.


경찰청, "이적표현물 목록 없다" 거짓말

이 씨는 지난해 3월 16일 경찰청을 상대로 부설 공안문제연구소의 △이적표현물 판정등급과 그 객관적 기준 △감정목록 △감정과 관련된 사건 △감정자 등에 대한 정보공개청구를 했으나 "공안문제연구소에서는 이적표현물의 여부를 판정하지 않고 있으며, 판결 결과는 판례를 참고하시고, 공안문제연구소에서는 이적표현물의 목록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라는 비공개 통지를 받았다. 하지만 이 답변은 지난해말 최 의원이 목록을 공개함으로써 거짓말로 드러났다.

이 씨는 같은해 4월 6일 연구관의 인적사항 공개를 추가해 다시 정보공개청구를 했으나 같은달 20일 부분공개 결정을 받았다. 당시 공안문제연구소는 '이적표현물 판정기준'에 대해 "수사기관에서 의뢰 받은 문건을 감정함에 있어 그 내용이 사회주의(공산주의) 혁명 사상이론 및 전략 전술상의 내용과 맥락을 같이 하는지…혁명투쟁을 선전, 선동 또는 찬양 등을 하는지에 대하여 연구관 개개인의 전문적 식견에 의하여 판단하고, 해당 증거물에 대한 위법성 유무는 판단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또 '이적표현물 판정등급'에 대해 "증거물의 감정은 '좌익', '용공', '문제없음'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좌익'은 그 내용이 사회주의(공산주의) 혁명 사상이론 및 전략 전술상의 내용과 맥락을 같이 하면서 사회주의(공산주의) 건설을 위한 혁명 투쟁을 선전·선동하는 것, '용공'은 상기 범주에 속하되 실천적 투쟁방법 및 목표 등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은 것, 그 외는 '문제없음'으로 구분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감정목록 등 정작 중요한 항목의 공개는 "(정보공개법 제4조 제3항의) 국가안전보장과 관련된 정보분석을 목적으로 수집하거나 작성된 정보"에 해당한다며 거절했다.

이에 대해 이 씨는 2004년 6월 제출한 소장에서 "(위 답변이) 지극히 추상적이어서 어떠한 기준이 적용되는지…전혀 알 수 없"다며 △용공 및 좌익으로 판단되기 위해서는 증거물이 최소한 어떤 내용을 포함해야 하는지 △'선전·선동·찬양' 여부를 판단하는 구체적인 기준은 무엇인지 밝힐 것을 요구했다. 또 "국가안전보장과 '관련'된 정보라고 하여 이를 공개하지 아니할 수 있게 한다면 비공개의 사유가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되어 정보공개청구권이 사실상 형해화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이번 판결에서 재판부는 경찰청의 손을 들어준 것.


'안보위협' 근거는 몰라도 된다?

이번 판결에 대해 사건을 담당한 조범석 변호사(법무법인 한결)는 "단순히 비밀로 지정되었다는 이유로 비공개한다는 판결로 전혀 동의할 수 없다"며 "정보공개를 통해 지금까지 국가기관이 일방적으로 검증하고 그것이 법원 판결에서 적극적으로 인용되어 왔던 관행이 과연 합당한지 국민들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상희 교수(건국대 법학)도 "판결에는 해당 정보가 공개되면 왜 국가안보가 위태로워지는지 근거가 드러나 있지 않다"며 "국민의 알권리를 우선해야 할 법관이 비공개 이유를 자신만 알고 이런 판결을 한 것은 직무유기"라고 비판했다. 또 "정보공개청구는 시민이 국가기관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므로 되도록 많은 정보가 공개되어야 한다"며 "공안문제연구소는 그동안 자행한 감정행위의 정당성을 잃어 해체될 예정인데도 법원이 구시대 냉전논리에 빠져 시류를 너무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이번 소송의 원인이 된 정보공개청구는 2003년 7월 이적표현물 제작·배포 등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연행됐다 결국 유죄판결을 받은 건국대생 김종곤, 김용찬 씨의 친구인 이 씨가 공안문제연구소에 주목하면서 제기했다. 이 사건은 노무현 정권 출범 이후 첫 국가보안법 적용사건으로 기록된 바 있다.

이 씨는 "두 친구들이 연행되기 전까지는 국가보안법에 대해 남의 얘기로만 생각했는데 유죄판결의 근거가 공안문제연구소 감정결과를 거의 인용하는 것을 보고 문제의 핵심에 연구소가 있음을 느끼게 됐다"고 정보공개청구의 배경을 밝혔다. 그는 "감정목록은 각종 공안기관이 국민들의 정보를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며 항소할 의사를 밝혔다.


98년 보안심사위 "외부 누설시 사회문제 가능성"…3급비밀로 지정

한편 판결문에 따르면, 지난 98년 4월 13일 경찰청은 공안문제연구소에 △수집일시·장소 △문건명 △작성자 △발행처 △주요내용 △성향의 항목으로 목록을 작성해 송부할 것을 요청했고, 이에 공안문제연구소는 같은달 27일 목록을 3급비밀로 지정하기 위한 보안심사위원회를 개최할 것을 요청했다. 같은해 5월 1일 열린 경찰대 보안심사위원회는 감정된 목록이 외부로 누설될 경우 △이적성 시비 및 창작·표현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논란을 야기시켜 사회문제로 될 가능성이 있고 △국내 대공기관에서 내사하고 있는 공작사항이 노출될 우려가 있으며 △목록에 수록된 자료 입수방법에 대한 적법성 시비가 야기되어 보안수사기관의 공신력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이 목록을 3급비밀로 지정할 것을 의결했다.

또 판결문에 따르면, 공안문제연구소는 연구소장을 중심으로 △서무과 △연구1부 △연구2부 △연구분석과로 구성되어 있으며 경찰청, 국가정보원, 국군기무사령부 등으로부터 문건의 감정을 의뢰받으면 배당받은 연구원이 감정서를 작성해 의뢰기관에 송부하고 서무과에서 감정서 목록을 작성해왔다. 목록은 1992년∼1997년, 1998년∼2004년의 두 권으로 나눠 보관하고 있으며 법원은 재판과정에서 이를 비공개로 열람하고 목록의 존재사실을 확인했다.

한편 경찰청 관계자는 "공안문제연구소는 이달중 기능이 폐지되고 그 인력은 경찰대 부설 치안연구소로 통합될 예정"이라며 "국무회의에서 관련 대통령령을 개정하는 작업이 조금 늦어지고 있지만 곧 개편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