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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논평] 비정규직 겨눈 죽음의 공포

최근 여수·광양산업단지의 비정규직 건설 노동자들이 급성 백혈병에 걸려 잇따라 사망하거나 입원해 충격을 주고 있다. 용접·배관공으로 수십년간 일해온 이들은 건설현장의 분진에 섞인 화학물질에 노출되었다며 업무상 재해신청·산재요양신청을 근로복지공단에 냈다. 공장 배관을 철거할 때면 잔류 유해물질이 많이 날려 정규직 노동자들은 슬며시 현장을 떠난다는게 이들의 증언이다. 하지만 하청회사를 옮겨다니며 하루벌어 하루먹고 살아야 하는 이들은 현장을 떠날 수 없었다.

95년부터 현재까지 여수·광양산단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백혈병에 걸리거나 사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지만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 더 많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건설산업연맹의 2003년 조사에 따르면 산재를 당한 노동자 중 산재보상을 받은 경우는 20.4%에 머물렀을 뿐 공상처리되거나 본인이 치료비를 부담해 산재발생 사건이 은폐된 경우가 75.4%에 이르렀다. 건설업계의 다단계 하청구조의 맨 위에 선 원청회사는 산재처리 비용을 전문건설업체로 떠넘기고 업체는 '십장'이나 '오야지'에게 떠넘긴다. 맨 밑바닥에서 숨죽이고 있는 노동자들은 목소리를 높이다 잘리기 보다는 산재 발생 사실을 아예 숨기거나 자부담으로 처리하기 마련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안전한 작업장을 만드는데 사측이 자진해서 투자하기를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어느날 갑자기 사내하청으로 전락하고, 상시적으로 필요한 업무임에도 일용직 노동자들이 일회용 종이컵처럼 쓰고 버려지는 노동의 불안정화는 단순히 낮은 임금과 상시적인 해고위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2001년 산업안전공단의 '비정형 근로자 안전보건 실태조사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노동자 1만명 당 사망자가 정규직이 0.29명인데 반해 비정규직은 무려 10배가 넘는 3.09명이었다. 보건사회연구원이 1999∼2003년까지 5년 동안의 통계청 사망자료를 분석한 결과 또한 상용직에 비해 임시 및 일용노동자의 사망위험은 3.01배, 기타 비정규직은 2.75배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부 통계로도 1년에 약 3천명, 하루에 8명의 노동자들이 산재로 목숨을 잃고 있다. 하지만 이 통계는 산재로 인정된 사례를 모은 것일 뿐 비정규직의 산재실태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통계자료조차 없다. 현장에서는 이번 사건처럼 독성 화학물질에 의한 산재나 추락사고 같은 전통적인 산재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죽지 않고 다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다. 산재를 예방하고 쾌적한 작업환경을 만든다는 산업안전보건법은 사업주가 이를 어겨도 벌금과 과태료를 부과할 뿐이다. 사업주의 책임강화를 위해 처벌 수위를 높이는 것과 동시에 산재를 기업에 의한 살인으로 규정하고 안전한 작업장을 만들 의무를 고의적으로 회피하는 사업주에 대해 형법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입법도 고민해볼만 하다. 한편 작업 중 산재발생 위험이 있을 때 노동자가 작업을 중단하고 대피할 수 있는 산업안전보건법 상 작업중지권이 실제로 작업장에서 행사될 수 있도록 사측의 손해배상 소송이나 징계권 행사 위협을 막는 방안도 도입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