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9일 한 장애인이 방안에서 얼어죽은 채 발견되는 참혹한 일이 일어났다. 경남 함안에서 홀로 살아가던 근무력증 장애인 조모 씨(지체장애 5급). 매서운 추위 속에서 낡은 보일러가 터져 물이 방안으로 흘러들어 왔지만, 혼자서 몸을 움직이지 못한 조 씨는 얼어붙은 물 속에서 꽁꽁 얼어가야 했다. 외로움과 고통, 절망 속에서 최후를 맞이해야 했던 조 씨의 삶은 빈곤과 차별의 덫에 걸린 중증장애인의 참혹한 인권현실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조 씨의 죽음을 두고 '그 사람 가족들은 도대체 뭐하고 있었나', '혼자서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는 장애인을 시설에 넣지 않고 왜 혼자 두었나'라는 생각을 갖는 이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장애인권단체들의 절박한 외침은 다른 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가족' 아니면 '시설'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장애인이 사회 속에서 자립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지원하라는 요구에 가속도를 붙이고 있는 것. 이 요구의 핵심에 '활동보조서비스' 제도가 자리잡고 있다.
대표적으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준)는 조 씨의 죽음이 외면과 방치라는 국가폭력의 결과라며 지난달 30일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하는 한편, 이달 3일에는 과천정부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보건복지부장관의 사과와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를 위한 태스크포스팀 설치를 강력 요구했다. 중증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지원하는 활동보조서비스가 제도화되어 있었더라면, 조 씨 사망사건과 같은 죽음의 행렬을 멈출 수 있다는 얘기다.
권리를 위한 권리, 활동보조를 받을 권리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하반신 장애를 가진 조제는 연로하신 할머니와 둘이서 살아간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조제가 혼자 지낸다는 소식을 듣고 다급하게 찾아온 츠네오가 어떻게 지냈냐고 묻자, 그녀는 '덤덤히' 말한다. 먹을거리는 구청 사람들이 가져다주고 쓰레기는 옆집 남자가 버려준다고. 대신 옆집 남자에게 가슴을 만지게 해준다고.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가슴을 만지게 하냐고 조제의 마음을 깊이 사로잡은 츠네오가 되묻는다. 조제는 절규한다. 청소차는 아침에 오고 구청 복지과 사람들은 낮에 잠깐 찾아오고, 나는 걸을 수 없고, 쓰레기는 버려야 하는데 어떻게 하냐고….
조제처럼 활동보조가 절실한 중증장애인은 전체 장애인 가운데 20%를 훌쩍 넘어선다. 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아무런 보조를 받지 못한 채 방치되거나 시설에 수용돼 살아가고 있다. 그나마 보조를 받는 이들도 대개는 가족의 도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중증장애인은 가족의 전적인 희생 아니면 시설수용이라는 양극단에 놓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혼자서 생활하는 중증장애인들은 엄청난 위험과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장애인은 '사회적 죽음'을 강요하는 격리시설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비장애인과 동등한 주체로서 '존재할 권리'가 있다. 특히 중증장애인이 독립적으로 생활하고 사회활동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그/그녀의 삶에 대한 결정권을 존중하면서 활동을 지원할 활동보조인이 필수적이다. 조 씨의 죽음이 보여주듯, 활동보조인의 지원이 없다면 장애인은 기본적인 생명과 안전마저 위협받는다. 가사, 교육, 노동, 문화생활, 성(性)생활, 자녀양육과 같은 일상생활은 물론 사회·정치참여로부터도 배제될 수밖에 없다.
"내 삶의 주인은 나", 대상화를 넘어 자율적 주체로!
더 큰 맥락에서 활동보조를 받을 권리는 장애인의 자율성 회복과 권한강화에도 기여한다. 존엄함에 대한 요구, 통제받지 않는 자율적 삶에 대한 요구는 인권의 역사를 움직여온 동력이었다. 그러나 장애인들은 작은 일상적 움직임조차 타인-그 사람이 가족구성원이든 의료인이든 시설운영자든-에 의해 강요당하거나 결정되는 삶을 살아야 할 '사회적 조건'에 놓여있다. 특히 시설에서는 장애인들이 격리수용된 채 작은 일상적 움직임까지 시설운영자에 의해 통제·관리된다.
장애인이 원래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사회에 의해 무력화된 존재라는 인식은 자율성 회복에 대한 요구를 낳았다. 장애인의 권한은 고립된 '장애극복 의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에 대한 통제권, 사회적 관계맺기와 소통을 통해 길러지는 것이라는 외침에 공명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당연히 장애를 치료·극복되어야 할 대상으로만 규정하는 의료화 모델, 장애인으로부터 사회 속에서 삶의 주체로 살아갈 권리를 앗아가는 시설화 모델, 장애를 개별 가족의 책임으로만 전가하고 있는 가족주의 모델은 전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사회구조가 아닌 장애를 문제의 원인으로 낙인찍는 구조에도 균열을 내야 했다. 이렇게 장애인이 "내 삶의 주인은 나"임을 사회적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운동은 '자립생활운동'으로 꽃피게 된다.
자립생활운동은 60년대 미국에서 싹텄다. 이 운동의 선구자인 에드 로버츠(Ed Roberts)는 '장애인의 자립성과 삶의 질은 아무런 지원없이 얼마나 걸을 수 있고 일을 해낼 수 있느냐가 아니라, 지원을 받으면서 어느 정도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가에 따라 측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애인이 어디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 언제 어떤 지원을 받을 것인지는 장애인 당사자가 선택할 문제이며, 정부는 이를 보장하는 사회환경을 구축할 책임이 있다는 것. 활동보조서비스의 제도화는 장애인들의 끈질한 투쟁이 거둔 구체적 결실이었다.
현재 미국, 독일, 일본 등에서는 최고 24시간까지 활동보조서비스를 제공하는 제도가 마련돼 있다. 올해 유엔총회 상정이 예상되는 국제장애인권리조약 제정을 위한 유엔특별위원회도 조약 초안에 장애인에게 독립적인 삶을 영위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활동보조서비스 제도를 포함시켜 놓고 있다.
이에 견줘 국내 상황은 매우 척박하다. 최근 2-3년간 장애인권단체들의 끊임없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보건복지부는 내년까지 시범운영을 거친 뒤 제도화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에 따라 복지부와 몇몇 지자체, 민간기금의 지원을 받는 소수 자립생활센터가 부분적으로 활동보조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지난해 9월, 전국 최초로 주민발의로 중증장애인 자립생활지원을 위한 조례안을 제출했던 광주에서는 조례안 명칭 문제에 발목이 잡혀 조례안 상정조차 불투명한 상황이다. 그 결과 중증장애인의 사회 참여가 늘고 자립생활에 대한 욕구는 확산되고 있지만, 제대로 교육받은 활동보조인의 지원은 기대하기 어렵다. 노동강도에 비해 활동보조인이 받는 임금도 턱없이 낮은 형편이다. 활동보조인 노조까지 설립돼 활동보조인 임금 인상과 자립생활 지원금 증액을 함께 요구하고 있는 외국 현실에 견줘 너무도 대조적인 상황이다.
장애인들이 사회 속에서 존재할 권리, 장애인들의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보장하기 위한 활동보조서비스의 제도화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인권의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