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각국이 진땀을 흘리고 있다. 미국 중앙정보부(CIA) 특별이송에 유럽 국가들이 연루됐다는 주장이 지난해 말 제기되자 사태 해명과 결백 증명에 너나없이 나서고 있는 것.
"고문을 원하면 시리아로, 사라지게 만들려면 이집트로…"
'특별이송'(extraordinary rendition)이란 한마디로 미국 정부의 '고문 아웃소싱'을 위한 용의자 수송이다. 미국법은 자국민이 자국민은 물론 외국인을 고문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이에 미국정부, 주로 CIA가 사용하는 방법이 특별이송이다. 즉 외국인 용의자, 주로 테러용의자들을 어떠한 법적·행정적 절차도 밟지 않고 비밀수송기로 다른 나라로 보낸 뒤, 현지 대리인들이 고문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확보케 하는 것이다. 영국 주간지 <뉴스테이츠맨>과의 2004년 인터뷰에서 CIA 전 직원 로버트 바에르는 심각한 취조를 원하면 요르단으로 보내고, 고문을 원하면 시리아로, 용의자를 다시는 안 보고 싶거나 사라지게 만들려면 이집트로 보낸다고 전했다. 이 외에도 모로코,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태국 등이 고문대행지로 꼽혀져 왔다.
CIA의 고문 아웃소싱이 새롭게 알려진 사실은 아니다. 미국의 특별이송은 1995년 시작해 2001년 9.11 이후 외국인 테러 용의자들을 상대로 계속 행해져 왔다. 유럽 언론들도 미국이 테러 용의자들을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으로 특별이송한 혐의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간간이 다뤄왔다. 그러나 CIA의 비밀수용수가 동유럽에도 있다는 <워싱턴포스터>의 지난 11월 초 보도와 유럽 국가들이 CIA 비밀수송기의 자국 공항 사용을 허락하는 등 특별이송에 협조했을 수 있다는 의혹 제기는 12월 초 미 국무성장관 콘돌리자 라이스의 유럽 방문 등과 맞물려 특별이송을 지난해 말 유럽 전역에 대대적으로 이슈화시켰다. 유럽인권조약 및 국제고문방지조약에 따르면 고문행위에 가담하는 것도 고문당할 가능성이 있는 곳으로 용의자를 보내는 것도 인권법 위반이다. '발달된' 민주주의, 유럽연합 가입 시 까다로운 인권기준 만족요구, 모든 회원국에 법적 효력을 가지는 유럽인권재판소의 판결 등으로 인권 보장의 선두주자로 자처해온 유럽연합에게 회원국들이 미국의 고문 아웃소싱에 연루됐다는 주장은 심히 당혹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
몇년 전부터 각국 정보기관 및 CIA에 의해 납치, 실종된 사람들에 대해 추적해 온 미국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와치'로부터 CIA 유럽비밀수용소 소재지로 지목된 폴란드와 루마니아는 즉각 부인 성명을 발표했다. 영국 정부는 2001년부터 2005년 사이, CIA의 비밀수송기가 200여 차례에 걸쳐 영국 공항을 이용했다는 주장에 대해 터무니없다고 일축하고 비밀수송기가 영국공항을 이용한 적 없다는 콘돌리자 라이스의 확답만을 되풀이해 왔다. 하지만 지난달 19일 언론을 통해 공개된 영국 외무부 비밀메모에 따르면 미국이 '특별이송'을 목적으로 영국 영토를 사용한 것은 최소한 2번인 것으로 밝혀졌다. 하원의 대정부질의에 대한 토니 블레어 총리의 답변을 돕기 위해 총리실로 전해진 이 메모에는 "그 이상일 수가 있다. 구체적인 답변을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충고가 담겨 있다. 이후 영국 정부는 공개할 만큼 다 공개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라크로 오가는 미군들의 중간 경유지로 일일 900여명의 미군이 통과하는 샤논 공항을 가진 아일랜드 정부의 경우 지난 4년간 CIA가 43번에 걸쳐 공항을 사용했음을 인정하고, 추후 CIA 특별이송을 위한 공항 사용은 없을 것이라는 확답을 미국으로부터 받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이탈리아의 경우 자국에 망명해 있던 이집트 출신의 하산 무스타파 오스마 나세르를 납치, 특별이송한 혐의로 CIA 요원 13명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수사 중이다. 그 외 스페인·스웨덴·아이슬란드 등 다른 유럽 국가들도 CIA 비밀수송기가 자국을 경유했는지 조사하고 있다.
미국 고문 아웃소싱에 유럽 국가들이 연루됐다는 보도 이후, 유럽의회 산하 법무·인권위원회 또한 즉각적인 조사에 들어갔다. 조사팀을 맡고 있는 스위스 출신의 딕 마티 의원은 지난해 12월 첫 보고에서 "미국이 콘돌리자 라이스의 유럽 방문에 앞서 한달 전에 용의자들을 북아프리카로 이송했다고 본다"며 "이들이 아직까지 유럽에 수용돼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지난달 24일 중간보고에서는 △용의자 재이송 혹은 고문 아웃소싱 시스템의 존재에 대한 일관성 있는 증거가 있고 △100여명이 넘는 용의자가 고문받을 가능성이 있는 제3국으로 이송됐으며 △유럽대륙 전체가 연루됐고 △유럽 정부들, 적어도 각국 정보 기관들이 이를 몰랐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발표했다. 또한 마티 의원은 미국과 유럽 여러 정부의 비협조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한편 비평가들은 이번 보고서가 새로운 것도, 어떤 증거도 증언도 자료도 없는, 스위스 치즈보다 더 구멍이 많은 보고서라고 평한다. 반면 인권단체들은 보고서의 발표를 환영하며 유럽의회 조사에 대한 각국의 협조를 촉구하고 유럽 국가들이 특별이송을 방지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럽의회 조사위원회의 최종보고서는 이달 21일경에 발표될 예정이다.
내 땅만 아니면 된다?
개인적으로는 유럽의회 조사위원회가 각국 정부와 민간단체의 협조를 받고 증거 보강을 계속해 CIA 고문 아웃소싱에 유럽국가가 명백히 가담했다는 결론의 최종보고서를 발표하는 것은 물론 피해자가 배상받고 관련국가의 책임자가 처벌받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희망이 이루어진다 해도 CIA 고문 아웃소싱을 다루는 유럽 각국과 유럽연합의 태도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미국의 고문 아웃소싱에 유럽이 연루됐다는 보도 이후 유럽국가들의 대응을 보면 부인, 발뺌, 모르쇠로 일관하기, 미국 확답 받기에 머무르고 있다. 조금 적극적이라면 자국의 연루 여부를 조사하는 것 정도이다. 유럽의회의 조사 대상 또한 회원국의 고문 아웃소싱 협조 여부에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이번 사태의 근본적 원인인 미국의 불법적 특별이송에 대한 언급은 회피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미국은 그 동안 비밀리에 행해 오던 고문 아웃소싱이 지난해 말 유럽에서 일반대중에게 알려지면서 이제는 특별이송이 테러리즘과 싸우는데 중요한 수단이라며 공공연하게 옹호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유럽 정부들은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영국 외무부 법률담당관은 직접 고문을 하거나, 용의자의 고문을 지시하지 않은 이상, 영국이 고문을 통해 입수한 정보를 확보하고 사용하는 것은 국제고문방지협약을 위반하지 않는다고 해석했다. 지난해 12월 영국 대법관들도 이런 법 해석을 만장일치로 지지했다. 이는 왜 유럽 국가들이 자신들의 고문 아웃소싱 연루설에는 펄쩍 뛰며 발뺌하지만, 그동안 아프리카·중동·아시아 등에서 행해져 온 미국의 고문 아웃소싱에 대해서나, 대테러 전쟁을 빌미로 한 특별이송 옹호에 대해서는 별반 언급이 없는지를 단편적으로나마 설명해준다.
국제고문방지협약의 핵심은 어떠한 이유에서건 고문은 용납될 수 없는 반인륜적 행위라는 것이다. 동유럽의 비밀수용소든, 북아프리카의 사막이든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다. 지구상 어디에서도 고문 행위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에 국제앰네스티 등 인권단체들은 정보기관을 포함한 모든 관련 기관의 감사권을 가진 독립적 조사기구를 설립해 철저한 진상규명과 함께 관련자의 엄벌과 피해자의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특별이송 및 특별이송과 관련된 실종·고문 등 반인륜적 행위의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 각국은 님비(Not In My Backyard)의 전형적인 태도를 버리고 불법적인 고문 아웃소싱의 즉각적인 중단과 재발 방지에 나서길 바란다.
- 2985호
- 고문·가혹행위,일반
- 이공은나
- 2006-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