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바람결에 흔들리는 머리카락, 뙤약볕이어도 부담스럽지 않은 한낮의 거리, 모든 게 낯설지만 두려움보다 호기심 가득 즐거운 표정을 지을 수 있게 하는 건 여행. 여행이기 때문이다. 요즘 서울 도심에서 보는 여행객의 얼굴에서 여행을 읽는다. 과거의 나를 읽는다. 나도 저랬지.
2007년부터 안식월이면 해마다 몇 주를 해외로 여행을 가곤 했다. 내 체질상 투쟁이 벌어지거나 누군가 부탁을 하면 몸을 그대로 두지 못해 ‘현장’으로 달려갈 것이 뻔하기에 외국으로 튀었다. 여행지의 매력에 빠져들 때도 있었고 여행이라서 그냥 좋을 때도 있었다. 국내든 국외든 여행은 그동안의 지친 몸과 마음에 새 기운을 넣어주니까. 그런 내가 2013년부터 해외로 튀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여행을 상상하거나 과거의 여행을 곱씹으며 최대한 덜 소진되기 위해 애를 쓰곤 한다. 그중 하나가 노래 듣기다. 특히 내 핸드폰에 저장된 에피톤프로젝트의 두 번째 정규 음반인《낯선 도시에서의 하루》는 노랫말이며 멜로디며 여행을 추억하기에 딱이다. 워낙 한번 산 물건을 오래도록 쓰기도 하고 한번 익숙하게 된 습관이나 좋아하게 된 장소를 떠나기 꺼려하는 사람인지라 핸드폰에 저장된 이 앨범은 아직도 6년째 그대로다. 특히 이 앨범은 거의 매일 듣는다. 앨범에 수록된 모든 노래가 좋지만 특히 좋아하는 노래는 ‘시차’, ‘초보비행’, ‘떠나자’ 이다. 제목부터 여행 냄새가 풀풀 나지 않는가.
시차
시차를 들으면 여행 갔던 지역의 교통수단이며 거리가 맴돌고, 숙소에서 나른하게 일어나 먹던 조식이 떠오른다. 여행에서 시차란 자신이 다른 공간, 다른 시간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물론 나는 워낙 시차에 잘 적응하는 몸이라 현지에서 여행하는데 어려움은 없지만,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문자나 전화를 걸 때 고려는 한다. 서로 다른 시간에 있다는 건 고려해야 할 게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차>
지금쯤 그대는 몇 시를 사는지?
오랜만에 먹는 아침이
가벼워진 나의 마음이 꽤 좋아 보여
느긋한 트램을 타고서 달리면
옆 자리의 꼬마 아이도,
좁은 골목길의 모습도 꼭 그림 같아
아직은 멀기 만한 나의 시간이
졸린 눈을 비비게 해도
스쳐가는 많은 것들을 다 끌어안고
지금쯤 그대는 몇 시를 사는지?
오랜만에 먹는 아침이
가벼워진 나의 마음이 꽤 좋아 보여
지금쯤 그대가 몇 시를 살던지
누구와도 같지 않으니
누구라도 다른 거니까, 큰 걱정 말고
노래 ‘시차’는 여행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도 생각하게 한다. 생각해보면 같은 공간에 있어도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간을 살고 있을 때가 많지 않나. 어떤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밝은 한낮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어둡고 외로운 불면의 밤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동시간을 통과했다고 생각했지만 서로 다른 시간이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을 때의 그 낯설음과 미안함과 아픔들이 있지 않나. 비단 국가폭력의 피해자만이 아니라 살다보면 성격의 차이든 스타일의 차이든 여러 이유로 동시대인이지만 상대에게서 시차를 경험하게 된다.
떠나자
그래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시차가 없을 때가 좋기는 하다. 시차가 완전히 없을 수는 없겠지만 시차가 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시차는 거리감을 키우고 거리감은 때로 서로 다른 곳을 향하도록 만드니까.
사람들 간의 시차가 커질 때마다 시차가 거의 없던 때를 떠올려보곤 한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그때로 돌아가 보자며 스스로를 다독여보기도 한다. 그래서 나에게 ‘떠나자’는 회한과 위안의 노래다. “떠나자/우리 함께했던, 우리 사랑했던 수많은 날로 다시 걸어가자/그래, 이제 가보자/저 멀리 어딘가에 환하게 웃던 날로 가자”(-‘떠나자’ 노랫말 중)
여름휴가가 한창이다. 과거로 미래로 국내로 국외로 떠나기 좋은 계절이다. 여행이 주는 낯설음과 설렘과 만남이 우리에게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어줄 것이다. 하루든 며칠이든 떠나다보면, 함께 떠나든 홀로 떠나든 여행은 환하게 웃게 만들지 모르니, 떠나자.
초보비행일지라도
홀로 가는 여행이더라도 여행지에서 길동무를 만나게 되니 ‘초보여행’일지라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사람에 대한 믿음, 새로운 공간이 나의 새로운 장소가 될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으니. 그래도 같이 손잡아줄 길동무해줄 사람이 있다면 함께 여행을 간다면 더 좋을 일이다. 삶은 여행과도 같아서 손 붙잡아줄 동무가 있다면 떠나는데 용기를 줄 것이다. 무슨 일이든 시작할 때, 떠날 때 초보비행을 응원해주고 손 붙잡아 줄 동무가 있다면 덜 휘청거리지 않을까. 휘청거리더라도 아름답지 않을까.
“그대여 내 손 잡아/날 붙잡아, 휘청이는 별에 넘어지지 않게/수많은 시간의 기적들을 끌어안고/할 수 있는 마음 모두 다해/같이 가자, 그 어디든, 내 손 잡아”(-‘초보비행’ 노랫말 중)
*2017 제주생명평화대행진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배에서 여행을 즐기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