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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지속가능해야 할 세상에, 반도체특별법이 설 자리는 없다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및 혁신성장을 위한 특별법안’(이하 반도체특별법)이 국회의 뜨거운 감자다. 반도체특별법은 반도체기업이 경쟁력을 키울 수 있도록 산업을 확장하는 데 필요한 전폭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는 여야 공통의 공감대 위에서 발의되었다. 반도체산업이 한국사회에 중요한 산업이라는 인식이 만연한 상황에서, 반도체특별법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연구개발직 노동자 주 52시간 노동상한제 예외적용’이 주요쟁점이 되면서 반도체특별법은 지난 2월 17일 국회 산자위 법안소위를 통과하지 못했다. 그런데 반도체특별법의 문제는 노동시간 예외조항만이 아니다.  

 

자원과 생명을 연료 삼는 반도체산업

기본적으로 반도체산업은 엄청난 자원과 에너지를 소모한다. 삼성전자에서만 국내 반도체 사업장을 굴리는데 하루 동안 물 34.4만 톤, 전력 77.6만GWh가 필요하다(2022년 기준). 이는 하루 동안 103만 명이 마실 물의 양, 129만 3천 대의 전기차를 충전할 전력량을 소모하는 것이다. 문제는 단지 소모량이 많은 데 그치지 않는다. 그만큼의 자원과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 필요한 댐, 발전소, 송전선로 등이 개발되며 주변 생태계가 파괴되는 문제도 수반된다. 석유·석탄·LNG 등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반도체산업은 국내에서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4대 업종 중 하나이기도 하다. 결국 반도체산업이 커질수록 자원을 소모하며 생태가 파괴되는 문제는 더 심각해질 것이다. 

정의롭지 않은 반도체산업의 문제를 반도체노동자들이 일찍이 겪으며 목소리를 내왔다. 삼성전자 반도체에서 일하던 황유미 씨가 급성백혈병으로 사망하고 유족과 시민사회가 산재인정 투쟁을 하면서 반도체산업 노동자들의 백혈병 문제가 하나둘 수면 위로 올라왔다. 반도체 생산 공정에서 벤젠, 포름알데히드와 같은 유해화학물질에 노동자들이 적절한 환기나 보호 장비 없이 노출된 게 원인으로 밝혀졌다.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할 권리, 일터의 위험 요소를 알 권리는 기업의 ‘비용 절감’과 ‘영업 비밀’을 이유로 보장되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모르는 화학물질의 사용은 더 많아지고, 지금도 반도체노동자들은 건강과 생명을 담보로 일하고 있다. 심각한 장시간 노동의 문제도 계속 있어왔다. 연구개발직 노동자들은 이미 탄력적 근로시간제 등으로 52시간을 초과해 일하고 있으며, 생산직 노동자들은 24시간 돌아가는 공장에서 2교대 근무를 하고 있다. 더 빨리, 더 많이 생산해야 한다는 압박을 주며 반도체 노동자들을 과로사로 떠미는 게 바로 반도체산업의 작동방식이다.

최근 기후위기가 심화하며, 막대한 자원과 생명을 연료로 소진시키는 반도체산업의 문제에 관심 갖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특히나 한국이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의 위상이 높아진 만큼 에너지 소모로 인한 환경 부담, 해외 현지법인의 폐기물 처리 등에 대한 책임 역시 커졌다. 그러나 반도체공장에 사용되는 유해화학물질의 사용을 통제하거나 에너지 소비량을 엄격히 관리하는 등 규제를 강화하는 세계적인 추세에 한국은 오히려 역행하며 반도체특별법을 추진하고 있다.

 

투쟁으로 세워온 사회적 기준을 무너뜨리는 반도체특별법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의 반도체 대기업을 밀어주면서 반도체산업을 지원하고 육성하는 데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겠다는 것이 반도체특별법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클러스터(집적단지)를 짓겠다는 계획 속에 용수·전력 등의 공급체계를 신속히 조성하며, 이를 추진하고 운영해가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규제는 풀어주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하에 반도체특별법이 우리 사회에서 세워온 원칙과 기준을 흔들고 있는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주 52시간 노동상한제 예외적용’으로 논란이 일면서 주 52시간이 마치 표준노동시간인 것처럼 왜곡되고 있다. 근로기준법은 “1주 간의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외하고 40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2004년 주 40시간제가 도입되기까지는 법정 노동시간을 주 48시간에서 44시간, 지금의 40시간으로 단축시키기 위한 노동자 시민들의 시대적 요구와 오랜 투쟁이 있었다. 나아가 여전히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과로가 심각한 한국사회에서 노동시간을 더 단축해야 한다는 요구도 높아진 상황이다. 반도체특별법은 여태껏 만들어온 사회적 기준도,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도 무시하고 있다. 

신속한 추진만을 앞세우며 관련된 모든 절차를 축소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반도체 클러스터는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문제 없이 완성되지 않는다. 토지가 수용되어 이주해야 하거나, 공사로 불편을 겪고 자연지형이 변하며 생태계가 파괴되거나, 공장에서 폐기물과 폐수가 배출될 때 영향을 받는 모든 이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고 의견을 수렴하며 적절성을 따지고 대책을 마련하는 절차가 필수적이다. 그간 개발사업에서 숱하게 반복되어 온 문제들로 이러한 절차와 제도가 만들어진 것이지만, ‘인허가 신속처리제도’처럼 이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이 반도체특별법이다. 

 

‘다른 선택지’를 지우는 반도체특별법

반도체특별법이 제정되지 않은 지금도 반도체산업의 몸집을 키우기 위한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정부는 향후 20년간 자그마치 600조 이상의 국가 재정을 투입하여 반도체 클러스터를 짓겠다는 계획 속에 작년 12월 26일에는 “시간이 보조금”이라 강조하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착공 시기도 당초 계획인 2030년 6월에서 2026년 12월로 앞당긴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에 앞서서는 용인 지역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에서 폐기물처리시설 계획의 환경영향평가 절차가 주민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지난 2월 18일 국회 산자위에서는 반도체산업으로 급증할 전력 수요를 뒷받침해 줄 전력망과 해상풍력 설치를 용이하게 하는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과 ‘해상풍력 발전 특별법’이, 기재위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만 무려 6조 원가량의 법인세를 감면해주는 ‘K칩스법(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이렇게 사회적 기준을 무너뜨리며 빠른 속도로 반도체산업이 확장할 때, 우리가 마주할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한국처럼 반도체산업에 주력하는 대만에서 2021년 ‘최악의 가뭄’을 겪었을 때 대만 반도체 제조 기업인 TSMC의 공장에 물을 대어주기 위해 지역 주민들의 생활용수가 제한되고 대만 농지의 5분의 1에 달하는 농사가 중단됐다. 그 여파로 많은 물을 필요로 하는 작물의 생산량이 크게 감소하며 농산물 가격이 2배까지 급등했고, 농산물 수입을 늘리면서 식량자급률은 감소하고 있다. 이는 우리에게도 먼 미래가 아니다. 기후위기로 줄어든 강수량 때문에 한국 역시 가뭄과 물 부족의 위험에 처해있는 와중, 수자원공사는 2030년 반도체산업에 필요한 물이 하루 325만 톤에 달할 거로 전망했다. 누구에게 혹은 어떤 목적으로 얼마나 배분할지의 기로에 놓인다면, 마시고 씻고 먹거리를 키우는 물보다 반도체공장에 쓰일 물을 우선으로 ‘선택’하는 게 정답이 될 수 있을까. 정치권은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닫으면서 반도체특별법을 밀어붙이려고 한다. 이는 생명과 생태를 파괴하고 모두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문제로 이어질 것이다. 

 

지속가능해야 할 세상에 반도체특별법이 설 자리는 없다 

논란이 된 노동시간 부분에만 이견이 있을 뿐, 반도체특별법을 빠르게 제정하겠다는 의지를 여야 모두 밝히고 있다. 정치권은 반도체산업의 실적 부진이 노동시간 규제 탓인 양 책임을 돌리며 경영상의 잘못을 회피하는 재계를 대변하고 있다. 지난 2월 21일 양대노총을 찾아간 민주당 이재명 대표도 결국 노동자가 아닌 재계의 입장에서 ‘주 52시간 노동상한제 예외적용’의 문제를 바라보는 행보를 보였다. 장시간 노동으로는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 업무의 효율성 그 무엇도 지키지 못할 거란 연구개발직 노동자들의 증언과 사회적 비판의 목소리보다 반도체기업의 성장과 필요에 주목한 것이다.  

국회 안에선 ‘주 52시간 예외 적용’만이 반도체특별법의 거의 유일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지만, 국회 밖에서는 심화하는 기후위기에 반도체산업의 폐해를 근본적으로 고민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반도체기업의 이윤 축적을 위해 자원과 에너지, 수많은 생명과 인간을 소진하게끔 허락된 사회는 그 자체로 ‘기후 부정의’다. 기후재난, 삶의 재난을 멈추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자원 소모와 생명 착취를 확장하는 반도체특별법이 아니라,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생산하고 분배하며 소비하고 폐기할 것인지 ‘다른 세상’에 대한 질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앞으로 함께 만들어갈 세상에, 반도체특별법이 설 자리는 없다고 함께 외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