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제5차 6자회담에서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조치(소위 2.13 합의)’가 채택된 후 북미관계가 급진전되고 있다. 2.13 합의에서 ‘행동 대 행동’으로 30일, 60일로 나누어 단계적으로 약속한 이행 사항들은 30일이 훌쩍 지난 현재까지 별 무리 없이 잘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북미관계 정상화와 정전협정-평화협정 체결,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기대와 논의도 급물살을 타고 있다. 또 북이 핵시설 포기를 약속하고 나섬에 따라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현실화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2.13 합의의 의미와 기대
한반도 평화체제로 가기 위해 필수적인 북미관계 정상화와 한반도 비핵화를 현실적으로 이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과제와 의무가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이번 2.13 합의는 큰 의미가 있다. 게다가 미국과 북이 의지를 갖고 행동으로 실행하고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큰 기대의 근거가 되고 있다. 이번 합의를 통해 궁극적으로 북미관계가 정상화된다면 지난 50여년 동안 지속된 미국의 대북 경제봉쇄가 풀릴 것으로 기대된다. 대북 경제봉쇄가 풀리면 북의 경제상황도 일정 부분 원궤도에 오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북 인민들의 삶의 질이 개선되는 것은 북인권의 개선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문제다. 또한 북미 적대관계가 해소됨으로써 기대되는 한반도 평화는 남북 민중 모두의 평화적 생존권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인권의 가치다. 그동안 북미 적대관계와 남북 분단체제 속에서 남과 북 각 사회는 군사·안보주의를 강화하고, 국가주의를 절대화하며 시민·정치적 권리를 제한하는 등 인권의 가치를 왜곡시켜 왔다. 한반도 평화체제로 가는 과정은 이러한 모순과 이로 인해 왜곡된 인권이 개선되고 정상화되는 과정이어야 한다.
2.13 합의, 근본적인 정책 변화 없는 미국의 ‘전략적 변화’
하지만 북미관계 정상화와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장밋빛 희망이 분출하고 있는 이때에도 한미 간에는 대표적인 대북 선제공격 훈련으로 알려진 한미연합전시증원훈련(RSOI)을 3월 25일부터 31일까지 전국적으로 실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북을 적으로 상정하고 전쟁연습을 하는 한미연합군사훈련은 북미관계 정상화 및 한반도 평화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이율배반적 행동이다. 북 역시 RSOI에 대해 반발하고 있다고 한다. 당연한 반응이다.
지금과 같은 이런 모순적 상황은 미국의 변화가 근본적인 것이 아님을 드러내고 있다. 이번 2.13 합의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조심스러운 변화를 보여준다.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를 잠재적인 적대국으로 상정하고 중동과 동아시아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위기관리 전략을 취해왔다. 이란과 북을 ‘전략적인’ 적으로 상정하고 위협과 협상을 번갈아가며 ‘관리’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2.13 합의는 미국이 동아시아 위기관리 전략을 수정하고 대북 적대정책을 포기한 것과 같은 근본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것일까? 이에 대해 평화네트워크 정욱식 대표의 주장에 주목한다. 심각해지고 있는 이란 문제와 이라크전쟁, 그리고 중간선거의 패배, 네오콘의 몰락 등 일반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원인 역시 현재 미국의 정책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원인들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보다 주요한 원인으로 정 대표는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지난 6년간 부시 행정부는…미사일방어체제(MD)를 상당 부분 궤도에 올려놓았다”고 설명한다. 미국으로서는 더 이상 “북한 위협론의 활용 가치가 떨어졌다”는 것이다. 즉,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안타깝게도 대북 붕괴전략으로서의 미국의 동아시아 위기관리 정책은 근본적으로는 변하지 않았다. 2.13 합의 역시 그 긍정적인 의미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위기‘관리’ 정책의 일환 속에 있고 대북 붕괴전략 역시 지속되고 있다. 단지 미국이 위기를 ‘관리’하는 방식이 바뀌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반도 평화 체제로 가는 2.13 합의가 진행되고 있는 현재에도 미국은 아무렇지도 않게 한미 전쟁동맹에 기반한 대북 선제공격 훈련인 RSOI를 병행할 수 있는 것이다.
2.13 합의를 넘어서는 인권·평화운동의 과제
6자회담과 2.13 합의는 한반도 평화로 가는 주요한 교두보임에는 틀림없지만, 2.13 합의가 모두 실현된다고 해도 민중들의 평화적 생존권이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근본적인 변화를 통해 주한미군을 포함한 한미 전쟁동맹 같은 한반도에서의 근본적인 평화 위협 요소들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평화적 생존권을 전면적으로 실현할 수 없다. 또한 국가 대 국가 틀거리에서만 논의되고 있는 평화체제가 궁극적으로 민중들의 평화와 인권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지수다. 인권·평화운동은 민중의 입장에서 북미관계 정상화 이후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수립을 통해 평화적 생존권을 실현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6자회담에서 논의될 북미관계 정상화와 평화체제 수립을 넘어서는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과 한미 전쟁동맹, 주한미군의 존재 등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또한 인권·평화운동은 한반도 평화체제 이후 변화된 미국의 동아시아 관리 체제에 대해서도 더 깊은 고민을 지속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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