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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미국의 진정성은 왜 아무도 묻지 않는가?

[인권으로 읽는 세상] 분단의 벽은 판문점에 있지 않다

"북한이 정말 핵을 없앨까?" "그러겠지."

버스 뒷좌석에서 들려온, 20대로 보이는 두 사람의 대화였다. 바로 전날 있었던 남북정상회담이 종일 생중계된 효과인가 싶었다. 그런데 답했던 사람이 이내 말을 덧댔다. "설마 거짓말을 할까? 그럼 완전 ○○○ 아냐?"

여론조사업체 리얼미터가 남북정상회담 전후로 진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정상회담 이후 북한의 비핵화‧평화정착 의지를 신뢰하는 국민이 64.7%였다. 그런데 불과 하루 전의 신뢰 응답은 14.7%였다. 신뢰의 증가보다, 그동안의 불신이 얼마나 심각했는지가 눈에 들어온다. 신뢰가 늘어도 여전히 '북의 진정성'이 쟁점이 된다는 점에서 불신은 지속되고 있다.

북의 진정성을 누가 묻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어떻게 이토록 신뢰할 수 없는 국가가 되어버렸을까? 적어도 북한이 꽤나 일관된 기조를 견지한 국가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은 "우리가 11년간 못한 것을 100여일 만에 줄기차게 달려왔습니다."라고 말했다. 11년 사이에 있었던 변화는 남한의 정권이 '북한붕괴론'을 맹신하는 이명박‧박근혜 정권이었다는 점 말고는 없다. 남한이야말로 변덕스러운 국가였다.

핵에 관해서도 북한의 입장은 일관됐다. 북한에 대한 군사위협을 해소하고 체제 안전을 보장하라는 것이다. 김정은은 "종전과 불가침 약속을 하면 왜 우리가 핵을 갖고 어렵게 살겠나"라며 이를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처음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그동안 아무도 듣지 않았을 뿐이다.

남북관계는 언제나 국제관계였다. 남한은 북한과 가장 가까이 있지만 북한을 가장 모르는 나라이기도 하다. 남한이 보는 북한은 '미국이 보여주는 북한'에 가장 가깝다. 미국이 북한을 적대시할수록 남한을 지켜주기 위해서라고 이해하는, 비틀린 집단사고체계가 작동한다. 그러나 모든 국가가 그렇듯 미국은 자국의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움직일 뿐이다.

한반도의 분단에는 뿌리부터 미국의 큰 책임이 있다. 미군정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던 제주 민중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미국이 한반도 긴장 완화를 원할 때조차도 그것은 분단 해소나 평화가 아니라 미국의 관리 부담을 줄이려는 목표를 가졌을 뿐이다. 국제사회에서 북한을 신뢰할 수 없는 국가로 몰아간 것 역시 미국이다. 그러니 한반도에 사는 우리의 불안을 키운 것은, 팔할이 미국이다.

차라리 미국의 진정성을 물어야

한반도 평화가 '진정성'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면 차라리 미국의 진정성을 물어야 한다.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서는 미국의 약속이 중요하다. 군사적 위협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북한을 고립시켜왔던 전략을 바꿔야 북한도 핵을 내려놓고 경제에 집중할 수 있다. 그러나 트럼프가 약속을 잘 지킬 것이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당선 이후 그의 주특기는 다른 나라들과 맺은 협정이나 협약을 멋대로 탈퇴하는 것이었다.

평화를 옹호하는 인물이라고 추정하기도 쉽지 않다. 트럼프를 비롯해 주위에 포진한 인사들 대부분이 한반도 문제에서 강경파에 속한다. 평양을 오가며 김정은을 만나고 있는 국무장관이자 전 CIA국장인 마이크 폼페이오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권력을 지킬 만큼의 성과를 낼 것, 미국의 위상을 확인시키고 실질적인 이익을 챙길 것이라는 목표로 움직인다.

북미정상회담이 미 의회나 시민사회 전체보다 트럼프 개인에게 기대고 있는 점도 우려스럽다.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트럼프의 특성은 흥행요소가 되고는 있지만, 한반도의 정세를 개인의 트위터를 통해서 예측해야 하는 상황은 바람직한 것일 수 없다. 지금으로서는 돌파구를 만드는 힘이 될지 모르나 영구적이고 불가역적인 변화가 아닐 가능성도 그만큼 높다.

미국은 언제든 평화를 배반할 수 있다. 미국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은, 한반도 평화를 회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미국이, 북한이 어떻게 할지 쳐다보는 것이 우리의 과제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반도 평화체제를 이루려면 미국에 역사적‧정치적 책임을 더욱 분명히 따져 물어야 한다. 그리고 한반도의 남쪽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한다.

분단의 벽은 판문점에 있지 않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함께 북으로 넘어갔다가 남으로 다시 넘어왔다. 그곳에는 야트막한 표식이 있을 뿐 걸음을 가로막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불과 두세 걸음을 옮기는 일에 65년이나 걸리게 만든 분단의 벽이 있음을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그걸 넘어서는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분단의 벽은 판문점에 있지 않다. 분단은 군사적 충돌의 문제로 여겨지지만 이때에도 비물리적인 측면이 더 강하게 작용한다. 휴전선 인근의 물리적 충돌은 줄어들고 있지만 위협과 심리전은 더욱 심화되어왔다. 남북 양 체제는 의도적이건 비의도적이건 충돌이 있을 때마다 상대 탓을 하며 불안을 고조시켜왔다.

2014년의 '통일의식조사'에 따르면 남한 주민의 75%와 북한 주민의 63.7%는 상대가 무력 도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응답했다. 언제 공격당할지 모른다는 의식은 실제 군사적 충돌과 무관하게 우리 안에 자리 잡은 분단의 벽이다. 이것이 오히려 물리적 충돌을 정당화하는 악순환을 만들어왔다.

분단의 벽은 한국 사회 구석구석에 스며있다. 정치와 경제에, 사회와 문화에 분단이 있다. 법과 제도뿐만 아니라 세계와 역사에 대한 인식, 개개인의 사고와 감정체계 안으로까지 기입되었다. 분단의 벽은 어디에나 있다. 중무장한 비무장지대의 벽은 오히려 허물기 쉬울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게 세워온 벽들이야말로 견고하고 막막하다.

분단폭력을 넘어서

분단폭력은 군사외교적인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해방 이후 남북은 서로 이질적인 체제로 나뉘었다. 남북의 정치권력은 각각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국민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며 체제를 유지해왔다. 자유한국당과 같은 일부 보수정치세력의 문제만이 아니다. 북의 형법과 마찬가지로 남에는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는 국가보안법이 있다. 정치권력은 적의 실체를 확인시키기 위해 간첩 등 '이적행위'를 조작해가며 억울한 죽음과 고통을 양산했다. 현재진행형의 역사다.

남북 양측의 정보도 철저히 통제되었다. 서로가 상대를 이해하기는커녕 동등한 사람으로 여기기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북은 적자생존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남한의 사람들을 안타깝게 여긴다면 남은 경제적으로 뒤쳐진 북한의 사람들을 멸시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내재화된 분단의 벽은 남한 내 탈북민의 삶에서 투명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남한은 탈북민을 적으로 간주하여 심사한다. 정착을 지원하지만 간첩이라는 의심을 거두지 않으며, 북의 문제점을 드러낼 때에만 사회적 존재로 인정한다. 탈북민들은 빈곤보다 차별과 배제가 더 힘들다고 호소한다. 적을 타자화하는 관행은 '종북게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낼 정도로 종횡무진하기도 한다.

평화체제가 어떤 모습일지는 한국사회가 탈북민들을 동료시민으로 대접하는 모습을 그려보며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분단체제를 넘어 한반도 평화체제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한국사회 안에 똬리를 튼 분단을 해소해야 한다.

우리가 불가역적으로 변화해야

종전이 선언되고,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남북을 잇는 길들이 열리기 시작하면…. 설레는 일이다.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와 세계질서에도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변화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우리의 역사를 우리 스스로 써나가야 한다. 남북 양 정상은 일관되게 경제적 효과에 깊은 관심을 표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판문점이 열린들 길을 따라 자본만 넘나들고 분단체제는 그대로일 수도 있다.

해방 이후 반공 일변도로 획일화된 남한에서 왜곡된 역사 인식과 반쪽짜리 세계 이해를 되돌리는 일이 시작되어야 한다. 헌법 제3조 한반도영토조항으로 상징되고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실체로 구성된 공안체제를 종식시켜야 한다. 남북정상회담이 가능하게 한 신뢰의 증가는 북한에 대한 실질적 이해로 이어져야 한다. 모든 사람은 근본적으로 동등하다는 감각을 익히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남북의 양 정상은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러나 한반도의 전쟁은 총성보다 먼저 일상에 스며있었고, 포연보다 늦게까지 남아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국가보안법이 폐지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에는 필요했던 법이 실효를 다해 사라지는 것이라면, 안보 논리로 인권을 제압하는 체제의 습속은 옷을 갈아입을 뿐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를 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용인되는 사회는 언제나 전쟁 중이다. 우리 스스로가 불가역적 변화의 담지자가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민 모두는, 평화롭게 살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